너무나 많은 시작
So Many Ways to Begin
Jon McGregor
167 그들은 목소리를 낮게 낮추고, 서로 착 붙어서 얘기했기 때문에, 종알종알 하는 말들이 마치 촛불 연기처럼 서로를 향해 구불구불 나아가는 것 같았다.
159 만져야 할 살갗이 많았고, 만져져야 할 살갗도 너무 많았다.
167 만약 직장을 잃었다면 대신 미끄러져 들어갔을 또 다른 생이란 딱히 없다.
203 나중에, 몇 년 후에, 엘리너는 겁이 났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가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의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알 수 없이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고 말해주었다. 정말 공포에 질렸었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싶었지. 좀 갈팡질팡하면서, 내가 실수를 한 게 아닐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더랬어. 하지만 엘리너는 이런 것들을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숨겼다. 설겆이를 끝내고, 남편과 함께 앉아 나머지 저녁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보았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손을 셔츠 속에 넣어 살갗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하고 엘리너가 얼마 있다가 중얼거렸고, 데이비드는 끄덕였다.
323 자기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거기 있기는 했지만, 떠나고 싶었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349 그러고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이번에 겪은 것과 같은 주말이 몇 주까지, 때로는 몇 달까지 늘어나던 시절을 생각했다. 간절하게 상황을 고쳐보고 싶었지만, 어떤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원망에 차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던, 어둡고 느리던 나날들.
393 둘은 거의 매일 바쁘게 지냈고, 어느 기진맥진한 저녁 데이비드가 농담했듯이, 그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피해 다닌 평범한 생활을 마침내 맞이하여, 행복했다.
412~414
데이비드,
네가 열네 살 때 런던에서 줄리아랑 이 주를 보냈을 때 이후로는 내가 편지를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기억나니? 대영박물관의 모든 전시실을 보고 싶다고 했지. 네가 해냈는지 잘 모르겠다만. 그때 내가 왜 너한테 편지를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아마 양말을 좀 보내는 참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했거나. 정말 바보 같지만, 네가 보고 싶었던 것 같고, 그 당시엔 전화를 그렇게 많이 안 썼으니까, 그렇지 않니? 어쨌든 너에게 편지 쓰는 기분이 이상했단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
그런데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은 이게 아니야. 네게 하려고 했지만, 못 했던 말이 좀 있어서, 그래서 쓰고 있는 거고, 너희가 가기 전에 엘리너에게 줘서 너 주라고 할 참이다. 그런다고 겁쟁이 같다고 할 테냐?
지금 난 여기 반 시간째 벽을 보고 앉아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우리 이 짓을 너무 많이 되풀이해 왔잖니, 어쩌면 또다시 변명할 필요는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못했다. 너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 말야. 너도 알고 있지. 하지만 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너도 언젠간 이해하게 될 거다. 어쩌면 벌써 이해했는데 그냥 말을 안 했는지도 모르겠다만.
진실은, 데이비드, 내가 널 선택했다는 거야. 난 너를 기르기로 선택했어. 난 때로 네가 그걸 잊고 있는 것 같구나. 아니면 애초에 이해를 못 했거나. 난 너를 병원으로 도로 데려가서 모두 털어놓을 수도 있었어. 아니면 줄리아가 대신 네 엄마가 되게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때 너를 처음 안아 들자마자, 내 옆에 있는 수전이랑 벽난로 위에 있는 앨버트 사진이랑 같이, 넌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나는 널 키우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단다. 난 처음 시작부터 네 곁에 있었어, 데이비드, 널 내 자궁에 넣고 키우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네 기저귀를 갈고 널 먹이고, 네가 걸음마를 할 때도, 말을 배울 때도 그리고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할 때도 나는 네 옆에 있었단다. 내 가슴에 안아 들던 때의 네 몸무게나, 네가 첫 걸음을 뗄 때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손을 잡아 주던 느낌이랑, 밤에 침대에 넣어 줄 때 네 살갗에서 나던 냄새를 지금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어. 네가 처음 한 말은 엄마였어, 데이비드, 나에게 해 준 말이었어.
하지만 네가 사실을 알았을 때 나에게 화가 났던 건 이해할 수 있단다. 이 모든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도 화가 나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네 입장이었대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난 한 번도 나쁜 엄마였던 적은 없단다. 그렇지 않니? 우리는 너를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최선을 다했어, 그렇지 않니? 때로,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다만, 내 생각엔 네가 그 점을 충분히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난 한 가지 실수만 했다. 데이비드, 한 가지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그걸로 내 남은 인생 동안 비난받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란다. 이걸 읽고 있다면 아마 메리의 집까지 이제 반쯤 가 있을 테구나. 몸 조심하고, 응? 메리에게 내 인사도 전해주렴. 언젠가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렴, 가능하다면, 일이 그렇게 풀려 간다면 말야.
내가 보려던 프로그램이 시작을 하네, 그만 마쳐야겠다. 어쨌든 이미 넘칠 정도로 얘길 해 온 것 같으니까. 하지만 네가 거기서 원하던 것을 찾기를 기원하고 있단다, 데이비드.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 얘기를 해 주면 좋겠구나. 가능하면, 생각나면 전화해라. 그리고 제발 몸조심하고.
사랑하는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