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뭐라고
사노 요코 저/이지수 역 | 마음산책 | 2015년 07월 15일 | 원제 : 役にたたない日日
쪽수,무게,크기 256쪽 | 288g | 128*190*20mm
ISBN13 9788960902299
ISBN10 8960902292
206
좁은 우리 집 거실에 비해 지나치게 큰 텔레비전이다.
손님이 올 때마다 “이 텔레비전 뭐야?” 혹은 “진짜 크다!”라는 말을 들어서 부끄럽다.
나조차도 가까이서 찍은 러브신이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 텔레비전이 크지 않아도 고개를 돌린다. 키스나 성교장면은 징그럽다. 예전에 내가 저런 걸 했다니 거짓말 같다. 거짓말입니다.
209
‘애 낳는 기계’라는 말을 듣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여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네네, 맞아요, 남자는 단순한 종마랍니다. 기계보다 못하지요, 모쪼록 힘내세요, 하고 웃으면 될 일을.
223-224
무엇보다도 나는 화사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중략)
스무 살의 남자와 서른 살의 여자가 화사한 마음을 품는 건 괜찮다. 하지만 같은 열 살 차이라도 일흔에 가까운 여자와 예순이 다 된 남자는 안된다. 애초에 그럴 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더라도, 기적이라 할지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순이 다 된 남자는 여자가 젊으면 젊을수록 그 싱싱함에 끌리는 법. 거기에 어떤 의문이 있겠는가.
할아버지가 인기 있을 조건은 돈과 명예뿐이다.
여자 중에도 돈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만약 젊은 남자가 그런 여자에게 접근하면, 그가 사실은 순정파일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 여긴다
241-242
수술한 다음 날 나는 예순일곱 걸음을 걸어 집으로 담배를 피우러 갔다. 매일 담배를 피우러 갔다.
일주일간 입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가슴이 쓸모 없으니까, 가슴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항암제로 반질반질한 대머리가 되었고 1년 동안 살아 있다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사람 구실을 못하니 자리를 보전한 채로 한국 드라마를 보았고 그러자 턱이 틀어졌다.
뼈에 재발했을 때는 전이되었다는 생각을 못했다. 다리를 들어 가드레일을 넘었을 때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정형외과에 가서 뢴트겐사진을 찍자, 예전에 유방 절제를 해준 의사의 안색이 바뀌었다.
의사는 곧바로 암연구회를 소개해주었고, 암연구회에서는 지금의 병원을 소개받았다.
나는 행운아다. 담당의사가 근사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배우 아베 히로시를 쏙 빼닮은 외모에 키만 그보다 작았다. 의사로서는 드물게 잘난 척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언제나 웃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병원 가는 날이 기다려졌다. 일흔의 할머니가 근사한 남자를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쁜가?
첫 진료 때 의사에게 물었다.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쓸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그러자 나를 시기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코한텐 재규어가 안 어울려.” 어째서냐. 내가 빈농의 자식이라서 그런가. 억울하면 너도 사면 되잖아. 빨리 죽으면 살 수 있다고. 나는 일흔에 죽는 게 꿈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나는 틀림없이 착한 아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