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3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
우종학 (지은이)IVP2014-10-30
59
더 읽을거리
1. 크리스천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 휩쓸려 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바른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해 읽을 만한 주요 책을 소개한다.
• 신국원, 「니고데모의 안경」(한국 IVP).
•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한국 IVP).
•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한국 IVP).
2.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서 활발히 과학 활동을 해 온 크리스천 과학자의 예는 무궁 무진하다. 특히 과학과 기독교가 충돌할 만한 상황에서 크리스천 과학자가 취한 태도들을 과학사를 통해 공부함으로써 매우 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다음과 같다.
• 데이비드 린버그 외, 「신과 자연 기독교와 과학 그 만남의 역사(상·하)」(이화여자 대학교 출판부)
• 로널드 넘버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뜨인돌).
?
더 읽을거리
1. 과학과 신앙이란 주제에 관해 추천할 만한 크리스천 과학자의 책은 다음과 같다.
• 존 폴킹혼,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SFC 출판부).
• 알리스터 맥그래스,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한국 IVP).
• Owen Gingerich, God's Universe(Harvard Press, 2006).
2. 또한 불가지론자이면서 생물학자인 굴드의 책도 읽어 볼 만하다.
• Stephen Jay Gould, Rocks of Ages(Ballantine Books, 1999).
93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예가 많아. 하나님이 제비뽑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려 주는 경우가 꽤 있거든.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당첨되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외부의 통제나 방향성이 없이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사용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거든. 다시 말하면 과학적으로는 다양한 가능성 중에 하나가 실현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신의 계획이 담긴 사건일 수 있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눈같은 생물의 복잡한 구조가 진화라는 우연한 현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신은 얼마든지 자신의 설계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지.
99
2. 도킨스에 대한 비판서로는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 알리스터 맥그래스, 「도킨스의 신」(SFC 출판부),
• __. 「신 없는 사람들」(한국 IVP).
• 조애나 맥그래스 공저, 「도킨스의 망상」(살림출판사).
• 윤동철, 「새로운 무신론자들과의 대화」(새물결플러스).
3. 진화 이론을 받아들이는 불가지론자의 입장인 마이클 루즈의 책도 읽어 볼 만하다. 마이클 루즈는 진화론과 기독교가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보는데, 크리스천이 아님에도 그의 대답은 긍정적이다. 기독교를 보는 도킨스의 시각이 극단적이라면 루즈의 시각은 훨씬 균형잡혀 있다.
• 마이클 루즈,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청년정신).
119~122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영역의 문제를 다룬다 — 상호 독립론 혹은 분리론
독립론은 신앙과 과학은 각각 다른 영역을 다룬다는 입장입니다. 신앙은 초자연적 세계를 다루고 과학은 자연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많은 크리스천 과학자가 있고, 고인이 된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를 비롯한 많은 불가지론 과학자도 이 입장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입장은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책을 갖고 있는 기독교 전통에서 보자면 매우 설득력이 있는데요. 물리학자였다가 성공회 신부가 된 존 폴킹혼이 제시한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주전자에 물이 끓고 있을 때, 이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학적 설명인데 ‘열이 가해져 물 분자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물이 끓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또 다른 차원의 설명은 ‘누군가가 커피가 마시고 싶어 주전자를 불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물이 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설명은 각각 나름대로 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는 현상을 잘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두 설명은 서로 모순되거나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신앙과 과학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자연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하고 신앙은 그 자연 세계를 움직이는 분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 두 설명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취할 수 있는 것이죠.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어떻게’라는 문제를 다루고, 신앙은 ‘왜’라는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인간의 기원에 관해서도 과학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다루고, 신앙은 인간이 왜 만들어졌는가를 다룬다는 것 입니다.
상호 독립론의 중요한 점은 과학과 신앙이라는 두 가지 설명이 서로 독립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가령 과학의 내용이 바뀌어서 물은 120도씨에서 끓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물에 대한 올바른 과학적 설명은 ‘물에 열이 가해져 120도씨에서 물 분자가 활발하게 운동하고 있다’가 될 겁니다. 하지만 과학적 설명이 바뀐다고 해서 ‘누군가가 커피가 마시고 싶어 물을 끓이고 있다’는 다른 차원의 설명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끓이는 것이다’, ‘아니다, 라면을 먹으려고 끓이고 있다’는 논쟁이 있다고 합시다. 두 주장 중에 어느 것이 옳든, 열이 가해져 물 분자가 100도씨에서 활발히 운동하고 있다는 과학적 설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상호 독립론자들의 의견은 과학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이라는 겁니다. ‘과학이 무엇을 새롭게 발견하든지 우리는 계속 예수를 믿을 것이다’는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정설일 때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로 정설이 바뀐 뒤에도 사람들은 예수를 계속 믿었으며, 또 앞으로 어떤 새로운 과학적 결과가 나온다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과학과 신앙은 독립적이라는 견해입니다.
과학과 신앙은 연결되어야 한다 — 상보론 혹은 통합론
상보론은 독립론과 비슷한데 조금 다른 점은 신앙과 과학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과학은 전체 세계를 이해하는 면에서 서로 보완적이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 일종의 파트너라는 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프랜시스 콜린스 같은 ‘크리스천 진화론자’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차원의 영역을 다루고 설명하지만, 그 둘을 함께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과학이 서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독립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과 신앙이 독립적일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문제는 ‘어느 선까지 과학과 신앙의 파트너 관계가 가능한가?’입니다. 독립론의 견해에서도 과학과 신앙이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반면 창조과학자들처럼 성경을 기초로 과학 이론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128~129
둘째로 독립론에 대한 비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연 정말로 신앙과 과학은 독립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도킨스 같은 무신론 과학자들은 신이 인간의 삶에 관여한다면, 예를 들어 기도에 응답한다거나 죄를 사해 준다거나 한다면, ‘신도 과학의 탐구 대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신앙도 과학처럼 당연히 과학이 탐구해야 할 영역이기 때문에 ‘신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차원의 논의이며 서로 독립적’이라는 독립론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은 신에 대한 아무런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신앙은 무가치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도킨스 같은 무신론 과학자들이 갖는 신 개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 세계를 초월하는 신의 초월성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립론에 대한 상보론의 비판은 신앙과 과학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겁니다. 상보론자들은 신앙과 과학은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을 때에만, 즉 자연과 성경 두 책을 함께 볼 때에 제대로 된 신앙과 과학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과학이 독립적이냐 혹은 동반자 관계에 있냐를 판단할 때 ‘어느 수준에서 선을 그을 것인가?’입니다. 비록 신앙과 과학이 서로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다룬다고 해도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세계 — 신이 창조한 물리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 — 를 이해하는 면에서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다는 점에 독립론자들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상보론에 대한 비판은 과학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절대 진리라기보다는 계속 변해 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정설로 알려진 과학의 내용이 인간의 지식이 증가하면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 백 년 뒤에 대폭발 우주론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 고 우주는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대폭발 우주론에 의존해서 신의 창조를 변증했던 논리는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독립론자들은 이런 면에서 상보론이 너무 과학에 의존한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신앙에는 결국 합리성이나 과학으로 담보할 수 없는 믿음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결정적으로 이 믿음이라는 것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귀신들도 알고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독교의 복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도록 하는 믿음을 담보해 주지는 못합니다. 상보론자들은 이러한 믿음이라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을 통해서는 결코 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자연신학의 한계를 분명히 인정 해야 합니다.
물론 상보론자들 중에는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서 과학을 사용하기보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과학이 매우 유용하다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35~136
더 읽을거리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이 책에서 제시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지만 과학과 기독교의 상보적 관계의 정도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더 세분화되기도 한다.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관해 독자들에게 권할 책은 다음과 같다.
1. 리처드 칼슨,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논쟁」(살림출판사).
이 책은 창조론, 독립론, 조건적 일치, 동역관계 등 4가지로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분류하고, 각 입장을 취하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펼쳐 나간다. 그리고 각 입장의 마지막에는 다른 세 입장에 있는 저자들의 비판과 그에 대한 응답을 실었다. 저자들 대부분이 연구 활동을 하는 과학자들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그렇기 때문에 특히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는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2. 존 데이비스, 하워드 반틸 외 편집,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 」(한국 IVP).
제목 그대로 창조와 진화 논쟁에 대한 세 가지 ‘기독교적’ 입장들을 잘 설명한 책이다. 창조과학의 주류인 ‘젊은 지구론’과 소수 그룹인 ‘오랜 지구론’, 그리고 창조주가 우주를 창조할 때 창조계 안에서 모든 우주의 구성물들(은하, 별, 지구, 대륙에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낼 능력을 부여하셨다고 보는 ‘능력으로 충만한 창조론’ — 이 관점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관점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르고 이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을 주로 ‘진화적 창조론’이라고 부른다 — 이렇게 세 가지 견해와 각각에 대한 찬반의 논평이 이어지는 책이다. 과학, 과학철학, 신학 등 여러 관점에서 창조-진화 논쟁을 점검해 볼 수 있다.
3. 그 밖에 읽어 볼 만한 책은 다음과 같다.
• 이언 바버,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김영사).
• 존 호트,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걷다」(들녘).
252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충격에 빠지는 일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기적적 방법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믿던 사람이 자연적 방법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믿음으로 전향하기는 쉽지 않다. 우주 진화는 나름 쉽게 받아들여도 생물 진화는 수용하지 못하는 거부감에는 이런 심리적 장벽이 있다.
18세기에 뉴턴이 행성의 공전 운동을 중력으로 설명했던 때에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다. 천사들이 행성을 직접 밀고 다닌다고 믿었던 당대의 사람들에게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으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불신앙으로 보였다. 중력으로 행성의 운동이 설명된다면 신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행성의 운동을 중력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이 기독교에 도전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19세기를 거치면서 물리적 우주를 넘어 생명의 세계까지 기적이 아닌 자연적 방식의 창조라는 개념이 확장되자, 크리스천은 18세기 시절과 비슷한 충격과 오해에 빠졌다. 창조-진화 논쟁은 이미 백 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지만 충격과 오해를 넘어서 창조-진화 논쟁이 깨끗이 해결되기에는 더 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론물리학자이며 사제였던 존 폴킹 혼은 생물 진화의 경우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수용될 것이라고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