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3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은이),이언숙 (옮긴이),오찬호 (해제)민음사201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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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1년 일본에서 초판이 출간되었다. 지금도 일본은 여전히 ‘절망의 나라’ 이지만, ‘행복한 젊은이들’ 또한 건재하다.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었고, 일단 ‘아베노믹스’의 약진에 따라 일본의 분위기는 다소 좋아진 듯 보인다. 그러나 후쿠 시마(福島) 제1원자력 발전소 문제,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 저출 산과 고령화 문제 등 여전히 많은 골칫거리가 산적해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더욱 상승했다. 최근에 내각부(內閣府)에서 발표한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생활 만족도는 78.3%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NHK 방송문화연구소의 한 조사를 보면,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95%가 자신은 ‘행복하다.’라고 대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2장에서 언급했듯이, 젊은이들 스스로가 행복 하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반드시 ‘행복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독자들은 과연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도쿄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비행기로 불과 2시간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본에서 봐도, 한국은 가까우면서 먼 나라다. 이 책의 내용이 한국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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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치 대단한 연구자라도 된 양 이것저것 다소 까다로운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기술된 부분을 발견한다면, 좀 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읽어 줬으면 한다. 나를 포함해 본디 연구자라는 존재는, 논의에 자신감이 없을수록 다소 애매하고 난해한 방식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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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젊은이에 대해 말할 때, 곧잘 인용하는 짤막한 이야기 가 있다. 바로 “요즘 젊은이는 발칙하다.”라는 명문이 적힌 출토품이 수천 년 전의 유적에서 발굴됐다는 이야기 말이다. 종종 이 이야기의 무대는 메소포타미아가 됐다가, 이집트가 되기도 한다. 그 밖에도 다양한 변종이 존재하지만, 여하튼 한 번쯤은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일종의 도시 전설[각주]이지만, 옛사람들이 “요즘 젊은이는 발칙하다.”라고 말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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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출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는, 1939년에 초판이 발행된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의 『목면 이전의 일(木綿以前の事)』(이와나미쇼텐)이다. 이 책에는 ‘영국의 센스 노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집트의 어느 고적에서 발견한 ‘중세 왕조 한 서기의 기록(中世王朝の一書役の手錄)’을 전한다. 거기에는 “요즘 젊은이들은 재주만 믿고 경박한 풍조를 즐기고”, 그 점이 “개탄스럽 다.”라고 적혀 있었다. 즉,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인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기원전 8세기 무렵에 활약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시오도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깊이 삼가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매우 약아빠지고 인내력이 없다.” 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여러 논문에서 Pumpian-Mindlin, Eugene(1965) “Omnipotentiality, Youth, and commitment”,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Child Psychiatry》(4-1)을 참조하고 있는데, 이 논문에는 원전에 관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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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자리해 있는 생각은, ‘젊은이’를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타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타자이므로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또 그들을 비판함 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담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치인들이 ‘이해력이 좋은 어른’인 양 가장해 가며 “젊은이는 희망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해력이 좋은 어른들’은 실재하는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그들은 단지 ‘이상적인 젊은이상’을 말하는 것이므로, 자신과 비교해 볼 필요도 없고 부러워할 이유도 없다. 또한 ‘이해력이 좋은 어른들’은 이런 ‘이상적인 젊은이들’이 대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어른들)에게 ‘젊은이’는 ‘이질적인 타자’라기보다 ‘편리한 협력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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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젊은이들의 정체’
전 교토 대학교(京都大學) 교수인 오사와 마사치(大澤眞幸, 52세, 나가노 현)는 조사에 회답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 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나 장래의 인생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것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다양한 조사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고령자는 ‘행복도’나 ‘생활 만족도’에서 높은 수치를 나타낸다. 체력적으로 노쇠한 고령자가 아직 젊은 사람들보다도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언뜻 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고령자는 이제 더 이상 ‘지금보다도 훨씬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없다. 따라서 고령자들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대답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오사와 마사치의 가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20대의 ‘생활 만족도’가 상승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불황’이라고 하는 ‘어두운 시대’일 때가 많다.[그림13] 예컨대 1980년대 때 ‘생활 만족도’가 절정을 이룬 시기는 거품경제가 붕괴하기 직전인 1985년이었다. 1990년대의 절정은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옴진리교 사건과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한 이듬해인 1996년이었다. 2000년대 의 절정기는 ‘격차사회론’이 빈번하게 논의됐던 2006년도였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 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생활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 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에 집단 취직에 성공해 아키타 현(秋田縣)에서 도쿄로 상경한 한 젊은이 (20세, 남성)가 있었다. 그는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매일 10시간 정도(실질 노동 시간) 일했다. 그 와중에 회사 선배들의 욕설과 따돌림, 비난은 일상다반사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아키타 사투리가 콤플렉스여서 휴일에도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은 나날이었지만, 그는 “이런 고생 끝에 분명 찬란한 미래가 있을 것이다.”라는 신념을 버팀목으로 삼아 견뎠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 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충족화하는 젊은이들
행복한 젊은이들의 정체는, ‘컨서머토리’라는 용어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컨서머토리란 자기 충족적이라는 의미로,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딱 이 정 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어울려 여유롭게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생활 방식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 미리 ‘더 행복한 미래’를 상정해 두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주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젊은이들의 증가, 바로 여기에 ‘행복한 젊은이’의 정체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으로써 ‘생활 만족도’라는 ‘작은’ 생각에 대해 질문했을 때보다 ‘사회’라는 ‘큰’ 생각에 대해 질문했을 때, 젊은이들의 만족도가 하락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사회’라고 하는 ‘커다란 세계’에는 불만을 느끼지만, 자신들의 머물고 있는 ‘작은 세계’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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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공'이 되어 가는 일본의 젊은이들
중국에서 농민공의 생활 만족도가 높고 개미족의 생활 만족도 는 낮다는 점을 통해, 나는 다소 안타까운 결론 하나를 도출하게 되었다. 만약 일본이 격차가 고정된 계급 사회, 또는 신분제 사회로 바뀐다면 ‘혹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결론 말이다.
객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농민공과 자기실현 욕구, 상승 지향을 떨쳐 내지 못하는 탓에 불행한 개미족은 일본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현시점에 매우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20대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벌써 일본의 젊은이들이 어느 정도 ‘농민공화’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닐까.
현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경제 성장의 혜택을 충분히 받은 이전 세대를 ‘자신들과는 다르다.’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변에서 행복을 찾고 동료들과 함께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며 지낸다. 이제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쟁취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던 시대와 선을 긋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소소한 상호 승인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에 적합하고, 또 현명한 삶의 방식이다.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은 시대에 ‘부자’를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영영 그것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넘버원’을 목표로 하는 레이스는 고될 뿐이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런 경주에서 내려와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무리 선량한 어른들이 ‘젊은이 빈곤’을 사회 문제로 다루고, ‘젊은이들이 가엾다.’라고 부르짖는다고 해도, 정작 젊은이들은 그런 ‘우려’에서 현실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어떤 지역에서 태어났든, 어떤 가정에서 성장했든, ‘넘버원’을 목표로 삼을 수 있었던 ‘근대’가 마침내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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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26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되돌아보니 거기 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시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던 일, 그때의 수상 경력을 특기로 게이오 대학교 SFC(慶 應大學SFC)에 AO(Admissions Office) 입시로 합격했던 일, 그리고 SFC에서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는 친구를 만난 일.[1]
- ↑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놀랐으나, 글 여기저기에서 그정도의 미숙함을 엿볼 수 있기는 하다. 문장구성력 철학적 사고력 모두 비슷한 연배의 박가분(박원익)이 두세수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