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0 사는게 뭐라고

ph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은이),이지수 (옮긴이)마음산책2015-07-15원제 : 役に立たない日- (2010년)

29

 옛이야기를 들먹여봤자 아무 소용없겠지만, 예전에는 빈 병을 가지고 가게에 가면 참기름이든 식초는 무게를 달아 팔았다.
 가게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참기름을 작은 구리 국자로 떠서 손을 높이 들고 병에다 가늘게 가늘게, 마치 끈처럼 떨어트리는 모습을 마술 구경하듯 감탄하며 보곤 했다.
 마치 늘었다 줄었다 하는 생물 같았다.
 포장지를 두 번 접어 겹친 다음 종이 끈으로 칭칭 감아서 타래를 만들기도 했다. 감으면 감을수록 점점 커지는 끈 타래가 집집마다 있었다.
 아, 올바른 일본 서민이여. 어디로 사라졌는가.

223~224

 무엇보다도 나는 화사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보다 열 살이나 젊은 남자라면 예순에 가까울 테니, 그건 제법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반성한다. 죄송합 니다. 제가 우쭐거렸군요.
 스무 살의 남자와 서른 살의 여자가 화사한 마음을 품는 건 괜찮다. 하지만 같은 열 살 차이라도 일흔에 가까운 여자와 예순이 다 된 남자는 안 된다. 애초에 그럴 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더라도, 기적이라 할지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순이 다 된 남자는 여자가 젊으면 젊을수록 그 싱싱함에 끌리는 법, 거기에 어떤 의문이 있겠는가.
 할아버지가 인기 있을 조건은 돈과 명예뿐이다.
 여자 중에도 돈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만약 젊은 남자가 그런 여자에게 접근하면, 그가 사실은 순정파일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 여긴다.

241~242

 수술한 다음 날 나는 예순일곱 걸음을 걸어 집으로 담배를 피우러 갔다. 매일 담배를 피우러 갔다.
 일주일간 입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가슴이 쓸모 없으니까, 가슴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항암제로 반질반질한 대머리가 되었고 1년 동안 살아 있다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사람 구실을 못하니 자리를 보전한 채로 한국 드라마를 보았고 그러다 턱이 틀어졌다.
 뼈에 재발했을 때는 전이되었다는 생각을 못했다. 다리를 들어 가드레일을 넘었을 때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정형외과에 가서 뢴트겐사진을 찍자, 예전에 유방 절제를 해준 의사의 안색이 바뀌었다.
 의사는 곧바로 암연구회를 소개해주었고, 암연구회에서는 지금의 병원을 소개받았다.
 나는 행운아다. 담당 의사가 근사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배우 아베 히로시를 쏙 빼닮은 외모에 키만 그보다 작았다. 의사로서는 드물게 잘난 척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언제나 웃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병원 가는 날이 기다려졌다. 일흔의 할머니가 근사한 남자를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쁜가?
 첫 진료 때 의사에게 물었다.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쓸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그러자 나를 시기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코한텐 재규어가 안 어울려.” 어째서냐. 내가 빈농의 자식이라서 그런가. 억울하면 너도 사면 되잖아. 빨리 죽으면 살 수 있다고. 나는 일흔에 죽는 게 꿈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나는 틀림 없이 착한 아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