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30 공부론(2) - 이종범, 혹은 내야수의 긴장
(한겨레신문에 지금도 연재되고 있는 것인데,
글들이 너무 좋아서 다 퍼담기로 했다
1편은 다른 기자가 쓴것이라 가져오지 않았고, 김영민교수가 쓴 2편부터 가져왔다.
한겨레신문 홈페이지에서 '공부론'으로 검색해도 나온다.
밑줄은 내가 친것이라 전혀 신경쓰지 마시길.
밑줄이 거슬린다거나 신문에 실린 삽화까지 보고 싶다면 신문사 홈페이지로 고고~)
검도 고단자이기도 한 양선규 교수의 소설 〈칼과 그림자〉를 보면, “내 검도가 육체를 얻었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쉬운 말로, 저절로, 허세를 부리지 않는 지경에 들게 되었다고 해도 좋다. 혹은, 자기 생각의 틀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관념의 검도를 벗어났다는 뜻일 게다. 비록 관우의 청룡도를 얻었다고 해도 연습이 없으면 그것은 아직 ‘관념’이다.
자기 생각의 악순환 속에서 경화(硬化)하는 짓은 그 모든 공부의 지옥인데, 그 지옥을 뚫는 길은 타자(他者)의 지평을 얻는 길뿐이다. 근년의 많은 철학사상들이 필경 자기차이화(self-differentiation)의 체계에 귀속하는 변증법이나 대화주의에서 벗어나 타자의 문제에 깊이 골몰했던 것도 그 같은 시절 인연이 맺힌 풍경이다. 물론 어줍은 경험으로써 자기 생각을 박제화한 치들은 다만 절망 그 자체다. 그래서, 공부에 관한 한, 언제나 ‘조금 더’ 똑똑해지도록 겸허해야 한다. 가령 이윤기의 〈아주 특별한 손님〉(2006)이나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2006)과 같은 수작들은, 어떤 틈 속으로 스며든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이 어떻게 내 생각의 탑을 허무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타자성은 일종의 폭력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폭력적 개입이 없이는 필경 공부에 이르지 못한다. 타자(打者)와 투수가 삼진과 홈런으로 주고받는 폭력적 개입, 주자와 야수의 충돌이 선사하는 새삼스러운 내 몸의 현실! 진정한 타자, 진정한 폭력과 만남(충돌)이 없는 문사들의 논쟁은 그런 뜻에서 대체로 사이비다. 피아의 구별도, 심지어 무기와 몸의 구별조차 없는 두루뭉술한 관념적 혼란과 혼동으로는 공부의 기본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지 않으므로 살지도 못하며, 그렇기에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타자성의 체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치 도장격파(道場擊破)를 하듯이 각지의 지식인-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그 지식의 허구와 허세를 까발린 소크라테스야말로 지극히 무사적이지 않은가?
공부하지 않는 이들, 자기 생각과 경력의 오연(傲然) 속에 자의식의 깃발을 꽂은 이들, 싸워도 영영 죽지 않는 이들, 그리고 타자의 세계를 오직 자기 생각을 번식시키기 위한 뻐꾸기의 둥지로만 여기는 이들에게 세상은 오직 자기 생각의 표상으로만 의미 있는 관념의 덩어리다. 그들에게 모든 인식(cognition)은 재인식(re-cognition)의 동화체계 속으로 내재화시키는 짓이며, 이때 타자는 자신의 거울방에 다만 그림자를 남길 뿐인 풍경이다.
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實戰)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어떤 틈 속으로 스며든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에 자신을 넉넉히 노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 있는 긴장의 상태로 스스로를 부단히 조율해가는 일이다.
일본 최고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가 쓴 병법서인 〈오륜서〉(五輪書)는 ‘차림새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상태’를 유독 강조한다. 문사들이 지행병진(知行竝進)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형(型)을 뚫어내고 자기표현으로 나아간 단계로서, 이른바 검선일체(劍禪一體)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무사시의 해설을 덧붙이면, “몸이 정지해 있을 때에도 마음은 정지하지 않아야 하며, 몸이 민첩히 행동할 때에도 마음은 평정하게 하여 몸의 움직임에 끌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요컨대, 움직임 속에 머무름이 있고 머무름 속에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30년 이상 매일 몇 시간씩 버릇처럼 글쓰기를 계속해오면서 의도와 결실 사이에서 번득이는 바로 이 정중동동중정(靜中動動中靜)의 이치에 매우 익숙해졌는데, 그것은 마음이나 몸, 생각이나 손가락, 혹은 문사나 무사의 경우가 따로 나뉘지 않는다.
민활한 긴장의 일상적 배분이 생활화되는 가운데 ‘차림새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상태’는 찾아온다. 시쳇말로 바로 그것이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할 수 있는 경지다. 야구의 천재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종범 선수의 말이다: “내야수는 투수의 공 하나하나를 놓쳐선 안 된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그게 맞아 나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생긴다. 그런 적당한 긴장감이 타석에도 이어지게 되면 타자로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수비할 때에도 공격하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승엽이라면, 수비가 곧 공격인 사람이 이종범인 것이다.
김영민/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