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30 공부론(6) - 물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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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요!(It's different)’라고, 다들, 참새새끼들처럼 입을 모아 외친다. 이것은 핸드폰의 광고카피만이 아니다. 대중매체를 거울처럼 처리하는 상호모방적 상업주의의 체계 속에서 소비자-개인들은 작은 차이들에 몰두하고 탐닉하면서 자신들의 개성과 선택의 자유를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또, 참새새끼들처럼 입을 모아 외친다: ‘당신도 차이를 느껴 보세요!(You feel the difference!)’라고.


거대한 교환-경제 체계의 자기동일성을 배경으로 차이를 소비하는 것은 상품세계만의 일이 아니다. 공부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오염되었다. 가령,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흡수하고 전염시키는 그 피상적 순발력은 노래방과 핸드폰을 유행시키는 그 놀라운 템포의 상호모방적 메커니즘을 방불케 한다. 실로 이 시대의 실체는 유행이다. 무릇 공부는 근기이며, 시쳇말로 ‘엉덩이의 힘’인데,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을 부나비처럼 쫓아다니는 변덕의 상업주의에는 등뼈도 엉덩이도 없는 듯하다.


체계가 자아의 내부에서 바로 그 자아의 자기정체성을 통해 활동하는 것은 상품의 체계이든 지식의 체계이든 대차가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부르디외는 이런 현상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써 해명한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공부는 마음-공부와 더불어 반드시 체계-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문사 개인이 흡수하는 지식도 체계 속의 것이며, 개인의 열정과 냉소는 결국 체계적 모방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모방의 유무는 아예 이슈가 아니다; 살아있는 자라면, 특히 공부에 뜻을 둔 자라면, 그 누구나 모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방의 방식, 그리고 모방에 대한 태도 속에서 드러나는 공부의 모습이다.


문사들의 고질은 ‘허영’이다. 허튼 허영을 부리자면 단번에 목이 달아나는 무사의 세계와 달리 문사의 허영은 대개 공짜이기 때문이다. 허영의 요점은 ‘나는 달라요!’라는 지적·정서적 배치에 있다. 즉, 내 시선 속에 잡힌 남들은 모두 체계 속에서 서로 닮은 채로 엉켜 있지만, 나만은 체계 밖에서 남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는 오연한 허위의식이다. 아아, 아무래도 나는 더 깊고 나는 더 순정하다! 지라르(R. Girard)는 이를 일러 ‘낭만적 거짓’이라고 했는데, 굳이 정신의학으로 치자면 해리장애(dissociative disorders)에 가깝다.


특히 영리한 제자들이 허영을 부리곤 하는데, 그들은 스승의 영향을 애써 부인하고 모든 성취를 고독하고 독창적인 독학(獨學)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므로 허영은 자신의 지적, 정서적 생존을 위해서 무지의 체계에 의탁해 있는 꼴이다. 어느 새벽의 거울 속에서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는 아들은, 그리고 자신의 딸을 다스리는 요란한 방식 속에서 그토록 멀리하려 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는 딸은, (다시 지라르의 용어를 빌리면) 허영의 코쿤(cocoon)을 벗어나서 마침내 ‘개종(改宗)’의 문턱에 다다른 셈이 된다. 가령,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보이는 행태는 허영의 극치다; 그들은 자기정체성의 배경이 된 모방의 내력을 숨기거나 조작하면서, 대신 그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내세우며 모방의 정점에 위치시킨다.


여기에서 개종이란, 나 혼자만의 독창성이라는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는 실존적 체험을 말한다. 혹은 자기-생각의 거울방에서 벗어나 몸을 끄-을-며 밖으로 나가는 겸허한 체감을 가리킨다. 나 역시 체계를 윤동시키는 강박적 닮음의 메커니즘 속에서 하나의 단말기 구실밖에 할 수 없었다는 외상적 깨침을 말한다. 나의 존재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을 가리킨다. 우리 모두는 공부를 매개로 서로에게 물들면서 성숙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학인들의 허영은 그 물듦을 은폐하고 실없는 지적 독창성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더 큰 이름들에 속하기를 욕망하면서 정작 누구의 ‘그늘’이라는 말은 지극히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상황은 아주 모순적”(문정애)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마치 닮아간다는 것이 고대인들이 터부에 손댈 때 느끼는 두려움의 상태인 양 여긴다”(최성희)는 것이다. 그러나 학인들의 고질인 지적 허영과 냉소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도 타인들이 얼마나 깊고 넓게 자신의 존재에 구성적으로 관여하는지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의 태초에 ‘너’가 있었다!


무릇 공부를 하는 자, 물듦을 피할 수 없다. 독창(獨創)의 조건일지라도 그것은 ‘독립’이지 ‘고립’이 아니다. 물듦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바로 그 한계를 조건으로 승화시켜야 하며, 물듦의 조건을 슬기롭게 헤아려 근기있는 실천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강가를 줄창 떠나지 못하고 촐랑거리면서도 물에 젖지 않았다는 사실을 앞세우는 게 요령이 아니다; 오히려, 익사의 공포를 품고 범람하는 강물 속에 몸을 던지며 피안을 향해 한 획 한 자락씩 내 몸으로써 나아가는 길이 공부의 요체다.


김영민 /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