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15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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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주의의 최대 난점은 행복과 불행의 계량화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나는 행복과 불행의 수치화나 그 총 합을 구하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적자면, 공리주의의 난점은 어느지점에선가 순환논리같다는 점이다.
 행복(pleasure)의 총합을 증진시키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일종의 공리(public interests말고 axiom)처럼. 하지만 왜 이것을 공리로 삼는걸까. 이것이 정말 자명한가? 행복의 총 합을 더 늘리는 것이 왜 좋은가 하고 물을 수는 없을까. 행복의 총합을 늘리는 것이 자명하다고 하는 주장이 어느정도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행복의 총합이라는 개념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자명하게 '좋은 것'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수학적 증명이 가능한 문제는 아닐테니까. 그러면 예를 들어 죽을때까지 마약에 취해 사는 것보다 제정신으로 고통(pain)을 느끼며 사는 것이 왜 더 가치있는가. 아니라면 왜 아닌가. 이런 질문에 가장 흔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은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1]. 좋다. 그럼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더 장기적인 행복?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운, 그러니까 현실을 가장한 망상에 속지 않는 것? 아니면 뭘까. 여러가지 가상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면 공통점은 뚜렷하다. 진정한 행복은 그냥 '좋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 결국 행복의 총합을 늘리는 것이 자명한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명함의 이유로는 이보다 더 충분할 수는 없다. 그냥 좋고 싫고의 문제. 당부당이 아니라 호불호. 호불호는 그것 자체로 원래 자명하니까. 하지만, 자명함의 이유로서가 아니라 공리주의가 삼고자 하는 axiom으로서는 너무 부적당하지 않은가. 이대로라면 공리주의는 극단적 주관주의일 수밖에 없다. 호불호가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이를 피하려 사회 전체적 호불호를 계량하려는 시도는 공리주의를 순환논리로 만든다. 그것이 전체가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것.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복의 총합을 늘리기 때문에 행복의 총 합을 늘리는 것은 좋다(혹은 늘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애초 공리주의가 찾고자 했던 정의의 객관적 기준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무엇이 더 좋은가(바람직한가=당위)를 찾는 과정이 된다. 무엇이 더 좋은가를 논의하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미덕에 관해 논의하면 될 일이다. 미덕에 관한 논의나 합의에 대한 반발로서 공리주의를 들고 나올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그저께 한양대 면접을 보는 데 서면 대면 합해서 총 다섯문제가 나왔다. 그중 세 문제(두 문제는 토씨하나 틀림없이)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나왔다. 한 세 번쯤 읽었던 책이라 무난하게 적고는 나왔다만 적으면서도 참 교수님들 게으르시네. 혹은 그 밑에 쫄병들 참 게으르네. 이런 생각을 했다. 책이 너무 유명해져서 설마 여기서 나올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이렇게 된 마당에 또 나올지도 모르니 이번주 대비해서 한번 더 읽고 있다. 롤스의 정의론은 너무 딱딱한데다 번역이 참 성의없어서 안그래도 영어 못하는 나는 읽기가 참 힘들다. 이건 번역을 한 게 아니라 각 단어마다 일대 일로 뜻 찾고, 문장구조는 그대로 해서 한글로 옮겨놓은 말투다. 그러니 단어는 다 알아도 이해가 안가던 영어시험문제 보는 것 같다.

 내년 이맘때쯤 나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든 지금보다는 나을거라는 확신이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설마 -_-;
 
 아 그리고 요즘 한달 남짓 트위터에 버닝중인데, 별 생각 없이 짤막짤막하게 휘발성 글들 싸지르는거 - 완죤 내쓰따일. ㅋㅋㅋ
 

  1. "나는 공리가 궁극적으로 모든 윤리적 질문에 호소력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의 공리는 넓은 의미의 공리라야 하고,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이익을 줄 수 있는 공리라야 한다" - 밀 『자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