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최진영 저 | 은행나무 | 2015년 03월 30일
쪽수,무게,크기 177쪽 | 226g | 133*190*20mm
ISBN13 9788956608556
ISBN10 8956608555
각종 반전을 포함한 하이라이트 장면들이므로 책 읽을 사람은 아래를 읽지 말 것!
17
시든 국화처럼 지쳐 잠든
29-31
그렇게 설탕만 찍어 먹다가, 여름방학 때였나, 옷걸이에 걸려 있는 이모 바지에서 돈을 꺼내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담이 돈을 꺼낼 때 나는 이모에게 허락받았냐고 묻지 않았다. 훔치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고, 그런 질문으로 담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이모가 눈치를 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같이 도둑질을 했다고 해야 하나? 도둑질인 줄 몰랐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담에게 미안했다. 하지 말자고 말하기는 싫었다. 하지 말자는 말 자체가 담을 나쁜 애로 만드는 것 같아서. 담은 나쁜 애가 아닌데. 담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담이와 보내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담이 하는 짓은 나도 하고 싶었고, 담이 가는 곳에는 나도 가고 싶었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그런 것 없이 같이 있고 싶었다.
우리는 하루 한 번씩 이모 옷을 뒤졌다.
옷에서 돈이 나오면 좋아했고 돈이 나오지 않으면 실망했다. 어느 날 내가 먼저 이모 잠바를 뒤져서 돈을 꺼냈다. 담은 내 손에 들린 돈을 가만히 보더니 그것을 다시 이모 옷에 넣으라고 했다.
내가 할 거니까 너는 하지 마.
누가 하든 어차피 도둑질이잖아.
도둑질이라고 말하긴 처음이었고,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런 표현을 쓴 것을 후회했다.
아니까 너는 하지 말라고.
왜?
니가 그러는 건 싫어.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
⋯⋯
내가 하면 되니까 너는 안 하면 좋겠어.
그럼⋯⋯ 내가 하면 안 되는 거는 너도 안 하면 좋겠어.
60
구가 상처받길 바란 건 아니지만, 상처받지 않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모르겠다.
78-79
(전략) 우리는 서로를 보며 몇 마디 주고받았다. 분명 시시껄렁한 농담이었을 것이다. 노마는 그런 우리를 돌아보며 자전거 페달에 왼발을 얹고 오른발을 안장 너머로 올리며 주욱 미끄러져 나갔다.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굵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고 노마가 붕 날았고 금을 넘어 저 멀리 떨어졌다.
일 년 사이 한 뼘이나 키가 자랐지만 그래도 노마는 너무 작았다. 작아서 커다란 트럭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고 가벼워서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버렸다. 어묵을 좀 더 천천히 먹었어야 했나. 붕어빵이 없을 때 그냥 갔어야 했나. 붕어빵이 왜 없었지. 붕어빵이 있었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텐데. 자전거를 노마에게 맡기지 말았어야 했나. 자전거 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말았어야 했나. 뭘 어떻게 했어야 했나. 노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고 노마는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 어렸고 노마는 죽지 않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데 그런데도 왜 죽었을까. 노마의 죽음을 제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고도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야 했다. 다른 이유가 필요했다. 갓길 없는 이차선 도로에서 트럭이 팔십 킬로미터로 달렸고 따로 인도가 없었고 주변이 어두웠고 한겨울이라 길이 얼어 미끄러웠고 늦은 시간이라 트럭 기사는 피곤했고 노마가 너무 작고 가벼웠다는 그런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어째서 그때 트럭이 달려왔고 우리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졌고 노마는 자전거를 탔는지,
왜 노마인지,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
신만이 대답해줄 수 있는 그런 이유가.
89-90
누나는 내가 참고 있는 것들을 물음표의 꼬챙이로 거듭 낚았다.
94-95
이모 돈 벌기 힘들지.
그렇지.
미안해.
뭐냐. 그 뜬금없는 사과는.
이모, 나 간호사가 될까. 간호사 되면 일찍 돈 벌 수 있대.
그래봤자 앞으로 삼사 년은 더 있어야 하잖아.
그렇지 그럼 나 대학 가지 말까.
니가 대학에 가든 안 가든 나는 적어도 이십 년은 더 일해야 해.
어째서?
그럼 놀고먹냐.
덜 힘든 일을 할 수도 있잖아.
남의 돈 벌어오는 일은 다 힘들어. 안 힘든 일이 어딨어.
미안해.
니가 왜 미안하냐.
이모 힘들게 해서.
담아.
응.
나는 이 나이 되어서 부모도 서방도 자식도 없는데 니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효도할게. 내가.
동남아 보내주고?
응.
제주도도 보내주고?
응.
등산복도 사주고?
응, 그래야지.
⋯⋯구는 앞으로 어찌 살 건지 모르겠다. 빚이나 떠안지 말아야 될 텐데.
⋯⋯
걱정되지?
⋯⋯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걱정하는 마음?
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121-122
아무 인사도 없이 입대했다. 부모님에게도, 담에게도, 누나에게도,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도. 내가 몸담았던 모든 곳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철저히 혼자이고 싶었다. 나를 바꾸고 싶었다. 바꿀 수 없다면 버리고 싶었다. 버리고 다시 살고 싶었다.
163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166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