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소설집
ISBN-10 8932029091
ISBN-13 9788932029092
http://www.yes24.com/24/Goods/32682607?Acode=101
영영, 여름
122
메이의 런치박스 안은 휘황찬란했다. 소스까지 제대로 뿌린 두툼한 햄버그스테이크와 새우튀김, 닭튀김이 가득했고 두꺼운 햄과 치즈를 넣고 양상추가 밖으로 비어져 나올 만큼 커다랗게 싼 샌드위치도 여러 조각이었다. 다른 통에는 알알이 곱게 씻은 청포도와 한입 크기로 조각낸 멜론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1]
123~124
일곱번째로 같이 밥을 먹고 난 뒤 메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반들거리는 흰 조약돌이 모두 다섯 알이었다. 본 적 있어? 메이가 물었다. 돌이잖아. 내가 대꾸했다. 공깃돌 같아서 주웠어. 공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메이의 말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공기라면, 디 에어the air? 메이가 시범을 보였다. 메이의 손은 자그마했고 손가락들은 짧고 뭉툭했다. 메이는 먼저 조약돌들을 책상에 가지런히 뿌리고는 한 알을 수직으로 높이 던졌다. 한 알이 공중에 머무는 찰나, 나머지 네 개 중에서 하나를 재빨리 집고는 낙하하는 돌을 같이 받았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돌들이 메이의 주먹 안에 다시 모였다. 꺾기! 이번에 메이는 그 다섯 알을 한꺼번에 휙 던졌다가 손등으로 받았다. 그러곤 손등을 다시 튕기면서 얼른 손을 뒤집었고, 붕 떴던 다섯 개의 돌들은 메이의 작은 손바닥 안에 완전히 휘감겼다. 나는 입을 벌리고 메이의 묘기를 지켜보았다. 그건 조약돌과 공기(空氣)와 인간이 함께 벌이는 마술의 한 장면 같았다.
밤의 대관람차
139
명예퇴직의 꿈을 또다시 접은 초겨울 아침, 양은 어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눈뜨자마자 머리맡의 안경을 찾아 쓰고, 세수를 하고, 간소한 화장을 하고, 간밤 끓여놓은 국에 밥을 말아 반 공기쯤 먹고, 이를 닦은 뒤, 지난 세기의 어느 날 장만한 겨울 정장 중 하나를 꺼내 입었다. 역시 지난 세기의 어느 날 학부모에게서 선물 받은 목도리를 꺼내 두르고, 입을 만한 몇 벌의 코트 중에 하나를 골라 걸쳤다. 남편이 잠든 81제곱미터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서 양은 자신의 몸이 25년의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151
양은 그들의 사랑이 불투명한 도기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청주 같은 것이었다고 의심해야 했다. 한 잔씩 따라 달게 홀짝이다 보면 이윽고 비어버리는 것.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술병은 없었다.
해설
문학평론가 백지은 <공허와 함께 안에서 밀고 가기>
231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로 옮겨가기가 수십 해 반복되다 보면, ‘세월’이라 불러도 되는 시간들에 그 단어에 값하는 숱한 일들이 쌓이기도 했을 것이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나 영원한 이별, 또는 남에게 설명하기 힘든 기괴한 경험 같은 것도 더러 겪었으리라. 인생의 모서리가 퍽 닳아서 세상살이에 길들여진 이들을 ‘기성세대’라 부르면 되려나.
작가의 말
248~249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 ↑ 음식에 대한 묘사가 너무 리얼해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