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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1일 (화) 12:10 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어쩌면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글
평양과기대설립부총장 정진호 교수님 글.
아프간 사태- 모슬렘 선교를 위한 혹독한 체중감량
아프간 피랍인질 사태가 일단락 되었다. 2명의 순교자를 내고 21명이 귀환함으로 일단 인질들을 향한 눈물의 기도는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부터다. 인터넷에 쇄도하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 악플과 정부의 구상권 청구 발언, 모슬렘 선교에 대한 교계의 반응들이 인질 귀환 후 다가올 후폭풍을 예견하고 있다.
아프간 사태가 인터넷에서 매도하듯 정말 무책임하고 무절제한 일부 광신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인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슬렘 선교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하는 일부 기독교계의 발언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반지성적 행태로 비추어질 것이다. 기독교계 내부에서조차 의견일치가 안돼서 분분한 가운데, 유행성 해외단기선교에 대한 전시적 사역은 재고되어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확실히 한국 기독교는 거품이 많았다. 부풀려진 몸집을 감량하고 유행처럼 번져가던 감성적 해외선교행태에 대한 자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전략적 접근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연구와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철저히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왜 비기독교인들이 그토록 분노하는지? 어째서 기독교 선교 1세기동안 지속되어왔던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 감정들이 최근 20-30년 동안에 최악의 폭락주가로 떨어져야만 했는지? 철저한 분석과 자아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어쩌면 분노한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기독교의 존재 이유를 설정하는 정체적 문제이기에 여기서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는 데 기독인들의 딜렘마가 있다. 지상최대의 과제, 땅끝 선교의 행진은 어떠한 반대와 난관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번 사태 진행된 경과를 유심히 살펴보는 가운데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본질적 문제에 다시 천착하게 된다. 그것도 한국 교계가 그토록 목터져라 외치던 부흥 100주년의 뜻깊은 해에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터져야만 했을까?
이번 일을 통해 한국 기독교와 모슬렘권은 싫든 좋든 전 세계 메스컴의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역사적인 조우를 하게 되었다. 2명의 희생양의 피를 아프간 땅에 뿌리며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의 선전포고를 세계만방에 알린 셈이 된 것이다. 모슬렘은 탈레반을 통해 한국 기독교계에 대한 무력적인 선전포고를 하였다면, 한국 기독교는 순교현장을 전국민에게 생중계하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본질을 깨우치며 모슬렘을 향한 입밖에 낼 수 없는 영적 전의를 가슴에 묻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프간 사태는 한국 기독교에게 던져진 사명을 확인하게 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제 정부 방침을 통해 일반 국민들의 압박을 통해 모슬렘권의 보다 강화된 선교사 입국 금지 정책을 통해 모슬렘권을 향한 일반성도의 단기선교와 같은 피상적 감성 선교의 길은 철저히 봉쇄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길은 더욱 전문화된 전략을 통한 보이지 않는 행보가 남아있을 뿐이다. 정부도 국민도 모슬렘 자국민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산업계와 학계의 진출, 전문인 집단에 의한 장기 사역 거점 마련, 그 속에서 이어지는 단기(1주일 10일이 아니라 최소한 1-3년) 사역자들의 순환 봉사 등 소위 말하는 BAM(Business As Mission)의 전략이 세워져야할 것이다.
그 땅의 백성들을 위한 학교와 병원과 산업체의 진출이 이제는 남은 통로가 될 것이요 그것은 한국인들이 앞으로 모슬렘권 국가와 서방을 향한 새로운 생존 전략과 맞물려서 돌아가는 국가적 프로그램으로 함께 가야할 것이다.
감성적 선교 잔치는 끝났다. 우리는 혹독한 체중 감량 스파링을 거쳤다. 이제 본 게임의 무대에 올라설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계가 처한 현실은 자국민과 세계 여론의 비난 속에서 앞뒤좌우가 다 막힌 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결전을 앞둔 선수답게 침착함과 담대함과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옥문을 흔들어 깨뜨릴 만한 기도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우리의 형제 자매, 아들 딸들의 생환을 따뜻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나 적대적 언론과 국민들의 반발을 의식하며 어떻게 어떤 태도로 그들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심한 비난과 욕설에 휩싸여 이중적 고통을 당할 인질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 줄 수 있는가?
2005년 11월 이라크 무장세력에게 납치되어 117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영국의 평화 운동가 노만 캠버가 보여준 세계 여론에 대한 침착한 대응과 일관된 기독교 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준다.
자신을 납치했던 이라크인들에 대한 사랑과 변호를 끝까지 견지하며, 체포된 납치범들을 향한 복수와 분노의 감정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던 어리석고 뻔뻔한 은퇴한 이 물리학 교수에 대하여 영국내 일부 여론과 언론은 분노했으나 그가 각인시켰던 한 가지 사실은 기독교의 비폭력 사랑에 대한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었다.
http://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31696
우리에게는 전사의 칼과 활 뿐만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처럼 성령의 위로와 사랑의 권능이 필요하다. 우리의 치러야 할 전쟁이 복수와 폭력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를 전하기 위한 비폭력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과 위로가 이제 악몽같았던 43일간의 피랍 사건을 일단락하고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는 한국 기독교계와 샘물 교회와 풀려난 21명의 인질들과 또 순교자 유가족 위에 순결한 평화의 비둘기처럼 임하기를 기도한다.(루카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혹은 이에 더하여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쯤은 알고 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그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것 같다.
누군가 미친짓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쉽게 드는 생각이나 자연스러운 반응은
신랄하게 그가 미쳤음을 그의 귀에 대고 떠들어주거나, 패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려는 충동일 것이다.
그런 충동과 열정(?)으로 가득 찬 가운데 갑자기
"우리도 당신들의 시선은 대강 알고 있으니, 그렇게 애써 우리를 미쳤다고 이르지 않아도 됩니다"하고 부탁하기엔 인간들이 너무 미덥지 못하다.
내생각에 지금 합당한 1차적 반응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것들을 잘못해왔으니 속죄해야 한다 혹은 선교의 방식을 반성하자가 아니고
그래서 문제점은 무엇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은근슬쩍 반성의 기준이 세상에서 제시하는 기준들과 동화되는 현상을 보면서
저런 글이 목말랐다.
全君 2007.09.19 08:12
내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향한 태도와 하나님과 영혼의 중심을 향한 태도가 (다분히 이중적이지만) 달라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세상에 대해서 우리의 중심의 마음을 드러내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