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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설터 (지은이),박상미 (옮긴이)마음산책2013-06-10원제 : Light Years (1975년)</poem> | 제임스 설터 (지은이),박상미 (옮긴이)마음산책2013-06-10원제 : Light Years (1975년)</poem> | ||
− | <h3>65~</h3> | + | <h3>65~67</h3> |
− | <poem>해가 차갑게 빛나는 날이었다. 육 년 전 이날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제도사 두 명이 나와 | + | <poem>해가 차갑게 빛나는 날이었다. 육 년 전 이날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제도사 두 명이 나와 있고, 그들 앞에는 평면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무실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그 바람에 그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성자의 유골처럼 갈색으로 변해 땅 밑에 누워 있었다. 장례식 의복은 썩어가고 있었다. 그는 서른둘이고, 일과 꿈이 있고, 세상에 혼자였다. |
− | + | 그가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그는 1928년, 한 전쟁이 끝나고 다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다. 실제로 위기의 해였고, 20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해였다. 다들 그런 것처럼 그도 시대와 상관없이 태어났다. 병원은 이제 없어졌고 의사는 은퇴하고 남부로 갔다. | |
− | + | 그는 위대함을 믿었다. 위대함이 마치 하나의 덕목인 양,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덕목인 양 여겼다. 그는 어떤 종류의 인생을 생각했다. 커다란 바위나 그늘 밑에 있듯, 표면에선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빛나는 영예가 발견될, 언젠가 떠올라 세상의 빛을 보게 될, 그런 가능성이 있는 인생. 그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의 가치를 명확하게 볼 줄 알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선 어느정도 괜찮다고 믿는 편이었다. 그의 믿음 속에는, 그 상상의 중심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사진들이 있었다. 그 속에 들어 있을, 그가 설계한 유명한 건물, 어떤 비평이나 질투에 도 끄떡없고, 설사 건물을 허물어도 변하지 않을 부동의 사실. | |
− | + | 물론 그는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네드라만 예외였다. 그의 꿈은 해를 더하면 더할수록 점점 보이지 않는 사실이 되어갔다. 대화 속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그의 삶 속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꿈은 언제나, 마지막 날까지, 거대하고 훌륭한 범선이 썩어가듯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 |
− | + |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는 차라리 혐오되기를 원했다. 나는 너무 약해, 그가 말했다. | |
− | <h3> | + | “그게 당신의 스타일이야.” 네드라가 말했다. “기왕이면 써먹는 게 좋아.” |
− | <poem> | + | 그는 그녀의 생각을 존중했다. 그래, 그가 말했다. 계속 해야만 해. 나는 작더라도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건물 하나를 지어야 해. 그러고 나면 더 큰 거.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해. |
− | <h3> | + | 완벽한 하루는 죽음 안에서,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완전한 굴복에서. 몸은 나른하고 영혼은 온 힘을 다해 앞서 나간다. 숨조차 따라간다. 선이나 악을 생각할 기운은 없다. 다른 세계의 빛나는 표면이 가까이서 몸을 감싸고, 밖에선 나뭇가지들이 떨린다. 아침이고, 그는 천천히 일어난다. 마치 햇빛이 다리를 건드렸다는 듯이. 그는 혼자다. 커피 향이 난다. 개의 황갈색 털은 타오르는 빛을 빨아들인 듯하다. |
− | <poem> | + | 앞으로 펼쳐질 하루는 그 푸름 속에 있어야 했다. 그 거대함 속에 그가 살아내야 하는 음모가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지만 그 속에 있었고 대낮 하늘의 별처럼 보이지 않았다. |
− | + | 그는 한 가지를 원했다. 한 가지의 가능성, 유명해지는 거였다. 그는 인류의 중심에 있고 싶었다. 그거 말고 열망할 것이, 희망할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확신하듯 벌써부터 겸손하게 거리를 걸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부르주아의 삶의 꾸러미를 조심스레 펼쳐놓았을 뿐이고, 머리 밑으로 두피가 보이기 시작했고, 손은 깨끗했다. 그리고 지식, 그렇다, 지식이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농부가 헛간을 알듯 그에게 익숙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뉴타운’과 대성당과 홍예석과 코니스와 모퉁이돌을 알았다. 그는 알베르티와 크리스토퍼 렌의 삶을 알고 있었다. 설리번은 춤꾼의 아들이었고 브로이어는 헝가리 의사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식은 사람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지식을 경멸한다. 지식따윈 대기실에서, 밖에 앉아 기다리라고 한다.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
− | + |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을 가졌기에 이제 애 없는 부부가 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온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인생을 내던지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을 거라고⋯⋯.</poem> | |
− | + | <h3>?</h3> | |
− | + | <poem> 그리고 비리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매일 밤 물을 주듯, 발밑에 흙을 골라주듯 책을 읽어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고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디딤돌이었다. 이 이야기들, 심지어 이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 상상물들, 왕자, 나무꾼, 오두막에 사는 정직한 어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생각한다. 그는 아이들이 과거의 삶과 새로운 삶을 모두 가지기를 원했다. 과거의 모든 삶으로부터 나뉠 수 없는 삶, 과거로부터 성장하고 과거를 초월하는 삶, 그리고 또 하나의 삶, 독창적이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삶, 우리를 보호하는 편견과 삶의 형태를 주는 습관을 넘어서는 삶. 그는 아이들이 삶의 하락과 상승을 모두 알기를 원했다. 굴욕 없는 전자와 무지 없는 후자를 말이다. 그는 이 여정을 위해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있다. 마치 이 한 시간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 한 시간 안에 여물을 모두 모아두고 조언을 모두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아이들이 항상 기억할 한 문장을 생각해 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갈 길을 알려주는 그런 하나의 경구. 하지만 그는 그 문장을 찾아내지도, 생각해내지도 못했다. 그들이 소유한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될 텐데 그에겐 그게 없다. 대신 그는 차분하고 감각적인 목소리로 유럽과 눈 오는 러시아, 아시아의 작은 신화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최고의 교육은 오직 한 권의 책을 아는 데서 온다고, 그는 네드라에게 말한다. 순도 높고 균형 잡힌 교육이 거기서 온다고. 그리고 그 책을 항상 가까이하는 데서 위안이 온다고. </poem> | |
− | + | <h3>?</h3> | |
− | + | <poem>⋯그는 보드카를 두 잔 마시고 아이들에게 젓가락질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었다.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고 뚜껑이 열렸다. 새우와 완두콩, 닭고기 조림, 밥이 나왔다. 이중생활이란 건 완벽하게 자연스러워. 그는 마름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생각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대해 얘기했다. 황제들의 전설, 베이핑<sup>베이징의 옛 이름</sup>의 보트 놀이. 네드라는 조심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조심스러워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실수를 할까 봐 두려웠다. 그가 모르고 지나친, 무언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그 무엇, 그게 뭐였을지 생각해보았다. 미숙한 자의 죄의식은 의사 질병처럼 그를 적셨다. 그는 차분하려고, 현실적이려고 애썼다. </poem> | |
− | + | <h3>98~99</h3> | |
− | + | <poem> 지반은 자기 친구라고, 마르셀마스는 말하곤 했다. 그는 다른 친구가 없었다. 심지어 아내조차 친구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혼할 거였다. 그녀는 너무 신경증적이었다. 예술가는 복잡하지 않은 여자와 살아야 했다. 보나르의 여자처럼 구두만 신고 포즈를 취해주는, 그 나머지는 따라올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나머지란 매일 금방 만들어주는 점심 식사였다. 그게 없이는 일을 못했다.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처럼 더러운 손으로 식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감자와 고기와 두꺼운 빵조각을 먹었다. 그는 유머 감각이 없었다. 자기가 먹는 동안 모든 것이 저절로, 뭔가 예기치 않고 흥미로운 형태로 해결되길 바랐다. 욕조에서 미세한 거품이 다리를 덮을 때처럼. | |
− | + | “케이트, 엄마는 어디 갔냐?” 그가 말했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 |
− | + |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트에겐 배달부 남자애 같은, 절대 상처 받을 수 없는 사람의 권태로움이 있었다. 그녀는 난방도 안 되는 방과 밀린 공과금 속에서 자랐다. 아빠는 떠났다가 돌아왔고, 아빠가 돌아오면 사과나무를 깎아 색칠한 아름다운 새 조각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빠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녀는 그 일부를 기억했다. 아빠가 골라준 색깔 속에서 살았고, 해의 광선을 받듯 그 색들의 광선을 받았다. 찢어낸 스케치북에 발자국이 찍힌 것을 보았고, 자기 방에서 두꺼운 가문비나무 판자 위에 얼굴을 묻고 취해 뻗은 아빠를 보기도 했다. 그녀는 아빠를 배신할 수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는 마치 주먹싸움에서 얻어터지듯, 그렇게 딸 앞에서 패배자처럼 살았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때로 그림에 대해 얘기했고, 나무 가지치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 안에는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의 숭고함이 있었다. 생각들은 눈부실 정도였지만 무학자의 것이었고, 꿈은 거대했다. 버는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가족에게 주었고 그들은 그 돈을 썼다. | |
− | + | </poem> | |
− | + | <h3>119</h3> | |
− | + | <poem>그날은 모니카가 죽은 날이었다. 다리가 하나뿐이었던 그 아이. 외과 의사가 다리를 충분히 자르지 않았던 거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 다리에 다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두 헛일이었다는 듯이. 그 통증이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 다음에 열이 났고 두통이 왔다. 온몸이 퉁퉁 부어올랐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물론 몇 주가 걸렸다. 결국, 그날 저녁이었고, 비리는 나무를 들이고 있었다. 한 아름 안고 있어 나무껍질이 소매에 걸렸다. 그가 잔 나무들을 모아 둑을, 겨울을 날 작은 흉벽을 만들려 할 때 아이가 죽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직장에 있었다. 어머니는 접의자에 앉아 아이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아이는 갑자기 가 벼워졌다. 훨씬 가벼워진 채로, 무서울 정도로 사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 아이를 떠났다. 순진무구함, 울음, 아버지와의 의무적인 놀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이 모든 것에 무게가 있었다. 그것들은 떠나가고 용해되어 먼지처럼 흩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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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3> | + | 날들이 온기를 잃었다. 때로 정오가 되면 작별 인사를 하듯 한두 시간 여름 같다가 금세 온기가 사라졌다. 근처 과수원 가판대에는 진한 과즙으로 가득 찬 단단하고 노란 사과들이 놓였다. 이가 닿으면 사과는 몸을 터뜨렸고, 언쟁 같은 흰 조각들이 이에 남았다. 멀리 있는 밭,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축축한 대지에선 아직 토마토가 덩굴에 달려 있었다. 언뜻 보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토마토는 그 안에서 숨겨지고 보호되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거였다. </poem> |
− | <poem>하는 | + | <h3>121</h3> |
− | <h3> | + | <poem>“결혼에 관해 내가 좋아하는 점들이 있어. 그 익숙함이 좋아.” 네드라가 말했다. “마치 타투 같아. 어느 순간 너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피부에 새겨져 있으니 없앨 수도 없고, 심지어 했는지조차 몰라. 나는 좀 구식인가 봐.” </poem> |
− | <poem> | + | <h3>127</h3> |
− | <h3> | + | <poem> “진짜로 친하고,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고, 나 자신과 다른 행동을 하라고 절대로 요구하지 않는, 그런 사람하고 함께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요? 우리가 그랬어요.” |
− | <poem>우체통에 또박또박한 글씨가 쓰인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그는 바로 필체를 알아봤다. 복도에서 봉투를 열어 읽기 | + |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이브가 말했다. |
− | + | “물론 다른 문제들도 있었죠.” | |
− | + | 네드라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조용하고 권태로워 보였다. 네드라는 그의 셔츠 소매가 더럽고 손은 깨끗하다는 사실을,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유태인이었다. 그녀는 보자마자 알았다. 그들에겐 같은 비밀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남편과 비슷했다. 실제로 비리가 숨기고 있는 또 하나의 비리 같았다. 어찌어찌 피해 간 그의 부정적 자아.</poem> | |
+ | <h3>?</h3> | ||
+ | <poem> 어떤 이들은 절망감이 너무 깊어서 가만히 있을 때에도,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삶을 소모했다. 나중을 위해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아껴둘 필요를 못 느낀다. 매 시간이 추락이었고, 모든 것을 던져버리려는 시도였다. </poem> | ||
+ | <h3>145</h3> | ||
+ | <poem> 이브가 웃었다. 그녀는 치아 뒤에 금을 해 넣었고, 그래서 그 가장자리가 검어 보였다. 창녀의 이처럼 검게 빛났다. 그녀는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웃겼다. 그녀의 삶에는 단단한 기반이 없었다. 그냥 애매하게 열중했고 사는 걸 가볍게 여겼다. 그 웃음들, 그 근심 없는 분위기, 그녀의 매력은 거기 있었다.</poem> | ||
+ | <h3>169</h3> | ||
+ | <poem>그는 그녀를 안고 바다로 갔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그의 팔 위로 그녀의 긴 다리가 흔들거렸다. 파도는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계단 아래서 짖던 핫지도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 ||
+ | 이브도 나이가 들었다고 네드라는 생각했다. 아직 배는 안 나왔지만 피부가 늘어졌다. 허리도 굵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그녀를 사랑했고, 그래서 더 사랑했다. 이마에 슬슬 나타나는 가는 주름마저 아름다웠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그녀의 머리끝은 젖었고 몸은 물로 반짝였다. 젖은 팬티 위로 치구가 비쳐 보였다. 그녀는 애정에 푹 빠져 아노드에게 기댔다. 그의 스웨터를 입었는데, 스웨터가 엉덩이를 덮어 그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허리로 그가 팔을 둘렀다. “문제는,” 그녀가 말했다. “어쩔 수가 없다는 거야. 나는 유태인을 좋아하니까.” </poem> | ||
+ | <h3>174~175</h3> | ||
+ | <poem> 그해 그들의 친구는 마리나와 제럴드 트로이였다. 마리나는 배우였다.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에 출연했었다. 그녀의 눈은 강렬한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부자였다. 오래된 부자였고, 부유함이 구석구석에서 빛났다. 피부와 세련된 미소에서까지.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 헬스클럽에 갔는데, 레온이라는 늙은 그리스인이 트레이너였다. 여든이나 된 그의 팔은 아직 단단했고 머리는 새하얬다. | ||
+ | 네드라도 거기 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스포츠엔 관심이 없었지만 처음 몇 시간을 해보고는, 찻길 위 더러운 창문이 있는 텅 빈 헬스클럽에서 나이 든 트레이너의 헌신적이고 친구 같은 태도를 보고는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워실은 깨끗하고 넓었다. 초록색 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몸은 깨어났다. 갑자기 몸 안에 깊은 강인함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트레칭 할 때, 거꾸로 매달릴 때, 근육이 더워지고 이완되었다는 걸 느낄 때, 젊은 육상 선수가 된 것처럼 느낄 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이 몸을, 언젠가는 자신을 배반할 이 몸을 사랑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아니, 그녀는 그걸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몸을 배반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몸의 불멸성을 느끼는 시간들이 있었다. 서늘한 아침, 또는 여름밤 침대 커버 위에 옷을 벗고 혼자 누워 있을 때, 목욕할 때, 옷을 입을 때, 섹스하기 전, 바다에서, 피곤한 팔다리로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poem> | ||
+ | <h3>193</h3> | ||
+ | <poem> 집은 그들 위로 빛에 잠긴 채 서 있었다. 박공지붕 양 끝에 굴뚝이 있었고 슬레이트 지붕은 비에 탈색되어 회색이었다. 커다란 헛간처럼 집은 날씨에 얼룩져 있었고, 바다를 건너온 배 같았다. 주춧돌을 따라서 쥐가 살았고 집의 끝자락에는 잡초가 자랐다. | ||
+ | 광대한 날이 그들을 에워쌌다. 땅은 따뜻했고 강은 햇살에 반짝거렸다. </poem> | ||
+ | <h3>?</h3> | ||
+ | <poem>⋯⋯미풍이 목소리를 날렸고 5미터만 떨어져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대화가 보이기만 하고 들리지는 않았다.</poem> | ||
+ | <h3>?</h3> | ||
+ | <poem> 당신은 무명이 아니야, 사람들이 그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친구들이 있어. 사람들은 당신 작품을 좋아해. 그리고 결국 그는 좋은 아빠였다. 다시 말하면 무능한 남자라는 얘기였다. 진정으로 좋은 것, 훌륭한 것은 달랐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고 살인적인 것이다. 다른 공격 행위처럼 피해자가 생겼다. 간단히 말해 그건 정복이었다. 우리는 모호해야 하고, 우리는 부드러워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의도야 어쨌든, 눈부신 비전 속에서 사람들을 짓누르게 되는 것이다. 실패자는 바보고 허약한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사람에게 미덕이란 없었다.</poem> | ||
+ | <h3>209</h3> | ||
+ | <poem>그날 밤 네드라는 운전을 했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쯤 출발했다. 라디오에서는 시벨리우스가 쾅쾅 울렸고 바람이 차를 때렸다. 떨리는 가슴으로 조선소와 정제소를 지나쳤고, 허름한 마을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를 먹여 살리던 산업이 있는 곳이었다. 차는 양방향으로 이어졌다. 전조등은 더욱 밝아졌다. 어둠이 내린 것이다. | ||
+ | 그녀는 쉬지 않고 달렸다. 라디오가 지지직거렸고, 주파수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음악이 들렸다가 유령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가, 마치 낡아가는 거대한 차양이 드리운 것 같았다. 가난한 동네에, 물이 새는 지붕들 아래 있는 것 같았다. 값싼 광고판과 값싼 감상과 무분별한 소음으로 넘치는 동네에. 이 혼돈이 귀를 채웠고 맞은편의 전조등이 눈을 찔렀다. 까만 나무 위의 하늘이 도시들과 함께 빛났다. | ||
+ | 그녀는 어둠 속으로 달렸다. 옛날 동네들, 지치고, 배타적인, 팔고 되팔렸던 땅으로, 깊은 밤 속으로 달렸다. 길은 텅 비었다. 서스쿼해나 강을 건널 때 처음으로 졸음이 엄습했다. 운전하는 길은 꿈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생각했고 되찾아갈 과거를 생각했다. 끝없는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무기력함과 절망을 느꼈다. 벌써 했던 여행을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거였다. 병원의 복도 같은, 블루 마운틴의 길고 하얀 터널을 지나쳤다. 그러곤 투스카로라였다.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이름들은 그녀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리라 확신하면서. </poem> | ||
+ | <h3>238~239</h3> | ||
+ | <poem> 가정이 화목해도, 가족끼리 항상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프랑카와 얘기하는 걸 즐겼고, 프랑카에 대해서도 얘기를 잘했다. 현재는 과거의 반영이라는 맥락에서, 이 여자가 바로 자기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딸을 통해 삶을 발견하고, 두 번째로 맛보고 싶었다. | ||
+ | 휴가 중 하루는 데이나 집에서 파티가 있었다. 데이나의 얼굴엔 벌써 알 수 없는 무감각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거의 적개심에 가까웠다. 하지만 결국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네드라의 말대로 아빠는 주정뱅이에 엄마는 바보였다. 네드라는 그날 밤 칸딘스키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반질거리는 종이로 만든, 무겁고 아름다운 책이었다. 구겐하임에서 전시를 본 후 칸딘스키에 빠져 있었다. 저녁의 조용한 시간, 할 일을 다 한 후에 책을 펼쳤다. 책에서 칸딘스키는 늦게 그림을 시작했다고 했다. 서른 둘의 나이에. | ||
+ | 그녀는 이브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이 책 너무 좋아.” | ||
+ | “좋을 것 같았어.” | ||
+ | “이제 막 읽기 시작했어.” 네드라가 말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뮌헨에서 살다가 러시아로 돌아갔대. 십 년 동안 같이 살던 여자를 남겨두고, 이 여자도 화가였다네. 그녀를 다시 본 건 한 번뿐이었대. 상상해봐. 1927년에 열린 전시회에서였대.” | ||
+ |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속으로 들어오듯. 그녀는 흥분했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이 그렇듯, 윤이 나게 닦인 문장들이 딱 적당한 때 도착한 기분이었다.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poem> | ||
+ | <h3>?</h3> | ||
+ | <poem> “우리는 농담도 하죠.” 알바가 말했다. “그렇지, 클레어?” | ||
+ | “가끔씩요.” | ||
+ | 그들은 남자와 여자였다. 그 순간 그들은 더 좋아질 수 없는 한 장의 사진 같아 보였다. 정원에 서 있을 배나무와 물이 스민 자갈 깔린 진입로, 다 큰 딸이 가진 문제들까지 그대로 멈추어, 이 커플의 섭정 속에서 평화로웠다. | ||
+ | 비리는 이 이미지에 다소 놀란 채로 앉아 있었다. 그 자신이 종종 남들을 놀라게 하던 그런 이미지, 결혼 생활이 가장 순수하고 관대한 형태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연약해짐을, 무기력해짐을 느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 부부의 만족감 속에서 흠을 찾고 싶었지만 그 표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었고, 그 가늘고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녀 뺨의 모양과 그녀의 무릎, 그는 무서웠다. 자신의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공포는 고백할 수 없는 종류였다. | ||
+ | 네드라도 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삶은 이기적이고 고립되어야 한다는 증거를, 심지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전혀 모르는 여자가 명백하게 보여준 것이다. 알바 부부는 다른 삶이 아닌 어떤 특정한 삶을 원했고, 운 좋게도 그 삶을 함께 찾았다. 런던의 포토벨로 로드에서 그녀는 건초 색깔의 아름다운 랄리크 크리스털 병을 샀다. 그 병을 클레어에게 선물로 보냈다.</poem> | ||
+ | <h3>332~333</h3> | ||
+ | <poem>“어젯밤에 피터와 캐서린 집에 갔었어. 피터는 정말 훌륭해. 물론 당신 안부를 물었고.” | ||
+ | “잘 지낸대?” | ||
+ | “음, 뭐, 그 사람들은 아주 신기해. 서로 애정은 대단하지 않은 것 같은데 헌신적이야.” 그가 잠시 멈췄다. “우리도 그랬던 것 같지만.” | ||
+ | “뭐, 다들 그렇지.” | ||
+ | “당신은 잘 지냈어?” | ||
+ | “아, 나쁘지 않아. 당신은?” | ||
+ | “나는 가끔⋯⋯ 실제로는 수없이 그리로 날아갈 생각을 했어.” | ||
+ | “아, 비리, 생각은 고맙고, 당신을 보면 반갑겠지만, 하지만 그건⋯⋯ 아, 알잖아, 우리는 그러기엔 늦었지.” | ||
+ |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아.” | ||
+ | “쉽지 않지.” | ||
+ | 그녀는 그의 간청을 지혜롭게 넘겼다. 그게 그에게는 언제나 놀라웠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기 위해서 더 붙어 있고 싶었다. | ||
+ | “이 주 있으면 당신 마흔넷이 되네.” 그녀가 말했다. | ||
+ | “그래.” | ||
+ | “당신 생일 함께 못 있겠네.” | ||
+ | “마흔넷.” 그가 말했다. “이제 그 나이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 같아.” | ||
+ | “쉬운 부분은 지났지.” | ||
+ | “쉬웠어?” | ||
+ | “우리는 지하의 강으로 들어가고 있어.” 그녀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 ||
+ | “응, 알아.” | ||
+ | “그게 우리 앞에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용기조차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 ||
+ | “당신 알마 말러 또 읽고 있어?” | ||
+ |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예리했다. | ||
+ | 지하의 강, 낮아진 천장은 축축해지고, 물은 어둠 속을 흐른다. 공기는 습하고 차가워졌고 수로는 좁아졌다. 빛과 소리는 여기에 없다. 커다랗고 건널 수 없는 널빤지 밑으로 물살이 흐르기 시작한다. | ||
+ | “용기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건 무슨 말이야?” | ||
+ | “용기, 지혜, 아무것도 안 돼.” | ||
+ | “네드라⋯⋯.” | ||
+ | “응.” | ||
+ | “아무 일 없는 거야?” | ||
+ | "물론.” | ||
+ | “아니, 정말로 말이야. 네드라, 알지, 나는 항상⋯⋯ 여기 있어.” | ||
+ | “비리, 나는 괜찮아.” | ||
+ | “당신 행복해?” 그가 물었다. | ||
+ | 그녀는 웃었다. 행복. 그녀는 자유로워지고자 했다.</poem> | ||
+ | <h3>351~353</h3> | ||
+ | <poem>⋯⋯집에서는 맨 다리로, 맨발로 지냈다. 팔과 다리는 그을었고, 눈은 같은 회색이었고, 입술은 매끄럽고 창백했다. 안온한 날들. 우정이 있었고, 근심은 햇빛에 여과되었고, 해복했다. 아침에 그 집 앞을 지나가면, 아름다운 여자가 꽃에 물을 주고 딸이 그 옆에서 길고 하얀 고양이를 팔에 안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들이 집을 비웠을 때는, 창문은 조용하고 나무 상자위에 손바닥만 한 수영복들이 널려 있고, 검은 머리의 울새들이 비바람을 맞은 몸으로 잔디 위를 빠르게 날았다. | ||
+ | 그들이 바깥에서 볕을 쬐는 곳에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작은 노란 벌들이 치즈 껍데기를 먹고 있었다. 네드라는 양 손바닥을 볕에 달궈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8월 초였다. 바다는 노래를 했다. 아침에, 점심 직후 텅 빈 시간에, 바다 위로 은색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 몇이 소리를 지르며 놀았다. | ||
+ | 그들은 피터와 캐서린의 집을 방문했다. 커다란 나무 아래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그들은 앉아서 비리 얘기를 했다. 네드라는 드레스의 단추를 몇 개 풀고 배를 문질렀다. 소화에 좋다고, 그녀가 말했다. 머리 위 어둠 속으로 비행기가 희미한 소리를 흘리며 지나갔다. 별들 사이로 그 불빛이 지나갔다. | ||
+ | “지난 달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 좀 지쳐 있어요⋯⋯ 사는 데. 그동안 쉽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 ||
+ | “아,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가요?” 피터가 말했다. | ||
+ | “추측은 종종 틀리니까⋯⋯.” | ||
+ | “맞아요, 하지만 당신과 비리든, 누가 됐든 헤어질 때는 통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그 잘라진 조각이 똑같지 않은 거죠. 둘 중 한 명이 그 중심부를 가져가죠.” | ||
+ | “비리는 그 사람 일이 있어요.” | ||
+ | “하지만 당신이 그 신성한 일부를 가져갔어요. 당신은 살고, 행복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러지 못해요.” | ||
+ | “아빠 요즘 훨씬 나아지셨어요.” 프랑카가 말했다. | ||
+ | “우린 본 지가 한참 됐죠.” | ||
+ | “훨씬 좋아지셨어요.” 그녀가 안심을 시켰다. | ||
+ | “아직 그 집에 살아?” 캐서린이 물었다. | ||
+ | “아, 그럼요.” | ||
+ | 그들은 음식과 옛날 친구 얘기, 유럽과 읍내의 상점들, 바다얘기를 했다. 중요한 얘기는 나중에 꺼내는 사업가처럼 피터가 물었다. “네드라, 당신은 어때요?” | ||
+ | “저요?” | ||
+ | “그래요.” | ||
+ | “글쎄요, 오늘 저녁을 너무 잘 먹었고, 내 침대는 편안하고⋯⋯.” | ||
+ | “그래요⋯⋯.” | ||
+ | “생각 중이에요. 그런 질문에 답하는 건 좀 익숙하지가 않네요. 특히 나를 이해할 사람이라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가 어때 보여요?” | ||
+ | “피터” 캐서린이 설명을 했다. “네드라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거야.” | ||
+ | “실제로요,” 피터가 말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지만, 당신은 좋아 보여요. 전과 전혀 다름없이.” | ||
+ | “전과 다름없다⋯⋯ 아녜요. 누구도 전과 같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옮겨 가고 있어요.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에요. 그리고⋯⋯ 며칠 전 나는 이상한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끝은 까만 망토를 입은 해골이 아니었어요. 마지막에 나를 데려간 건 캐딜락을 탄 뚱뚱한 유태인 남자였어요. 그 시가를 피우는, 매일 보는 종류의 남자. 차는 새 차였고 창문은 닫혀 있어요. 그는 아무 할 말이 없어요. 너무 바쁘니까. 그러곤 그와 함께 가는 거죠. 그게 다예요. 어둠 속으로. 내가 왜 이리 말이 많죠?” 그녀가 물었다. “브랜디 때문인가 봐요. 이제 가야 해요.” | ||
+ |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녀의 삶은 잘 보낸 한 시간 같았다. 그 비결은 그녀가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화된 자신을 느꼈다. 날들은 바닥나지 않는 채석장에서 캐내는 돌 같았다. 그 안에는 책과 사소한 볼일들, 해변, 그리고 가끔씩 오는 우편물이 있었다. 그녀는 볕에 앉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우편물들을 읽었다. 마치 해외에서 날아오는 신문을 읽듯.</poem> | ||
+ | <h3>?</h3> | ||
+ | <poem> 비리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주머니에서는 썩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애매한 프로젝트와 약속들이 있었지만, 정작 할 일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붙어 있지 못하고 죽어가는 벌레처럼 미끄러져 내렸다. 힘도 없고, 이유도, 싸울 기력도 없었고, 그 시간들 속에서 흔들리고, 비척거렸다. 아, 그저 미친 사람처럼, 신자처럼 죽음을 향해 뛰어갈 수 있다면, 정신이 혼미해진 채, 멍하게, 사랑에게 뛰어가던 그 빠른 걸음으로, 그러다가 어느 조용한 이른 오후, 어딘가 앉아서 신문을 펼치는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poem> | ||
+ | <h3>415</h3> | ||
+ | <poem>⋯⋯ 죽음의 기미가 느껴졌고, 연약해 보였다. 생각할 수조차 없는 사실이 벌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노인이 될 것이다. 그는 믿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고 허락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인생의 의미가 아니던가. | ||
+ |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아모레?” | ||
+ | “응.”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가운을 입었다. “그래, 나 괜찮아.” | ||
+ | “이리 와요.” 그녀가 말했다. “차를 만들어드릴게요.” | ||
+ | 날이 가듯 더디긴 했지만 그는 나아졌다. 어느 시점이 되자 테라초 바닥의 차가움도, 찢어지는 듯한 전화벨 소리도, 가뭄처럼 찔찔 나오는 수돗물도 거슬리지 않았다. 끝도 없는 우울증을 겪은 후, 불면의 밤들을 보내며 가망 없는 비참한 삶 속에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나니 오히려 천천히 머리가 맑아졌고, 심지어 차분해졌다. 다시 읽고 생각할 수가 있었다. 날이 조용히 밝아왔다. 지나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조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자신에게 남은 것을 챙겼다. 자신의 팔다리와 얼굴을 만지며, 지나간 일을 잊는 중요한 작업을 시작했다. | ||
+ | 그는 일상에 행복해하는, 평화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감사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 완벽하게 실감은 나지 않았다. 기차에 앉은 사람이 창밖의 풍경을 보는 듯했다. 때로는 생생한 풍경이, 때로는 텅 빈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poem> | ||
+ | <h3>416~417</h3> | ||
+ | <poem> 우체통에 또박또박한 글씨가 쓰인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그는 바로 필체를 알아봤다. 복도에서 봉투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비리에게⋯⋯.’ 이렇게 멀리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어제처럼 와 닿았다. 그의 눈이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항상 모든 게 실수였다고, 마음을 바꿨다고 그녀가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녀의 그 말에 즉각 굴복의 대답을 하지 않을 날은 단 하루도, 한 시간도 없었다. 마치 출전 명령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퇴역한 지 오래된 군인 같았다. 아무것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다시 뛰는 가슴을 안고, 장비를 꺼내 늘어놓고, 결국엔 집과 고향을 떠나는 노병. | ||
+ | 그녀는 1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다. 필요하다고, “살다 보면 그렇잖아”라고 했다. 꼭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 ||
+ | 1만 달러. 리아에게는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지 뻔했다. 이탈리아 삶에서의 돈의 중요성, 그 엄격함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청소하러 오는 여자에게 일주일에 2만 리라<sup>약 10유로</sup>정도 주었고, 베네토 거리에서 파는 구두의 값은 돈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로마는 남부의 도시였고, 자본은 돈과 부라는 쇠도끼 위에 놓여 있고, 은행은 영안실 같았다. 이탈리아 사람은 돈이라면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 ||
+ | 리아가 편지를 읽었다. 말이 없고, 싸늘했다.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그럴 수 없어요. 왜 돈이 필요하다는 거죠?” | ||
+ | “그 사람 뭘 요구한 적 없었어.” | ||
+ | “그 여자 당신을 빨아먹을 거예요. 그 여자 돈에 신경 안 쓴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그냥 물 쓰듯 하는 거라고요. 지금 돈을 주면, 육 개월 후에 또 달라고 할 거예요.” | ||
+ | “그럴 사람이 아니야.” | ||
+ | 그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의심을 하고 경계를 품은 이 여자에게는 아니었다. 가냘픈 이 여자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세상사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 ||
+ | 그날 저녁을 먹을 때 그녀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음울한 포크 소리가 공기에 걸렸다. | ||
+ | “아모레, 내가 부탁 하나 할게요.” | ||
+ |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그는 알고 있었다. | ||
+ | “맞아요, 물론 당신은 알고 있지요.” 그녀가 동의했다. | ||
+ | 그녀는 의기소침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이 다른 여자의 존재를 인정하듯이. | ||
+ | “보내지 말아요.” 그녀가 간청했다. | ||
+ | “리아, 왜?” | ||
+ | “보내지 말아요.” | ||
+ | “알았다고.” 그가 말했다. | ||
+ | “아모레, 날 믿어요. 내가 알아요.” 그녀는 냉소적인 견해의 수호자였다. | ||
+ |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몰라.” | ||
+ |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부엌으로 그릇을 가져갔다. 그리고 돌아왔다. </poem> |
2019년 9월 8일 (일) 22:10 기준 최신판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은이),박상미 (옮긴이)마음산책2013-06-10원제 : Light Years (1975년)
목차
65~67
해가 차갑게 빛나는 날이었다. 육 년 전 이날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제도사 두 명이 나와 있고, 그들 앞에는 평면도가 펼쳐져 있었다. 사무실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그 바람에 그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성자의 유골처럼 갈색으로 변해 땅 밑에 누워 있었다. 장례식 의복은 썩어가고 있었다. 그는 서른둘이고, 일과 꿈이 있고, 세상에 혼자였다.
그가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그는 1928년, 한 전쟁이 끝나고 다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다. 실제로 위기의 해였고, 20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해였다. 다들 그런 것처럼 그도 시대와 상관없이 태어났다. 병원은 이제 없어졌고 의사는 은퇴하고 남부로 갔다.
그는 위대함을 믿었다. 위대함이 마치 하나의 덕목인 양,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덕목인 양 여겼다. 그는 어떤 종류의 인생을 생각했다. 커다란 바위나 그늘 밑에 있듯, 표면에선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빛나는 영예가 발견될, 언젠가 떠올라 세상의 빛을 보게 될, 그런 가능성이 있는 인생. 그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의 가치를 명확하게 볼 줄 알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선 어느정도 괜찮다고 믿는 편이었다. 그의 믿음 속에는, 그 상상의 중심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사진들이 있었다. 그 속에 들어 있을, 그가 설계한 유명한 건물, 어떤 비평이나 질투에 도 끄떡없고, 설사 건물을 허물어도 변하지 않을 부동의 사실.
물론 그는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네드라만 예외였다. 그의 꿈은 해를 더하면 더할수록 점점 보이지 않는 사실이 되어갔다. 대화 속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그의 삶 속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꿈은 언제나, 마지막 날까지, 거대하고 훌륭한 범선이 썩어가듯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는 차라리 혐오되기를 원했다. 나는 너무 약해, 그가 말했다.
“그게 당신의 스타일이야.” 네드라가 말했다. “기왕이면 써먹는 게 좋아.”
그는 그녀의 생각을 존중했다. 그래, 그가 말했다. 계속 해야만 해. 나는 작더라도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건물 하나를 지어야 해. 그러고 나면 더 큰 거.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해.
완벽한 하루는 죽음 안에서,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완전한 굴복에서. 몸은 나른하고 영혼은 온 힘을 다해 앞서 나간다. 숨조차 따라간다. 선이나 악을 생각할 기운은 없다. 다른 세계의 빛나는 표면이 가까이서 몸을 감싸고, 밖에선 나뭇가지들이 떨린다. 아침이고, 그는 천천히 일어난다. 마치 햇빛이 다리를 건드렸다는 듯이. 그는 혼자다. 커피 향이 난다. 개의 황갈색 털은 타오르는 빛을 빨아들인 듯하다.
앞으로 펼쳐질 하루는 그 푸름 속에 있어야 했다. 그 거대함 속에 그가 살아내야 하는 음모가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지만 그 속에 있었고 대낮 하늘의 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를 원했다. 한 가지의 가능성, 유명해지는 거였다. 그는 인류의 중심에 있고 싶었다. 그거 말고 열망할 것이, 희망할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확신하듯 벌써부터 겸손하게 거리를 걸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다. 고작해야 부르주아의 삶의 꾸러미를 조심스레 펼쳐놓았을 뿐이고, 머리 밑으로 두피가 보이기 시작했고, 손은 깨끗했다. 그리고 지식, 그렇다, 지식이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농부가 헛간을 알듯 그에게 익숙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뉴타운’과 대성당과 홍예석과 코니스와 모퉁이돌을 알았다. 그는 알베르티와 크리스토퍼 렌의 삶을 알고 있었다. 설리번은 춤꾼의 아들이었고 브로이어는 헝가리 의사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식은 사람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지식을 경멸한다. 지식따윈 대기실에서, 밖에 앉아 기다리라고 한다.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을 가졌기에 이제 애 없는 부부가 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온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인생을 내던지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을 거라고⋯⋯.
?
그리고 비리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매일 밤 물을 주듯, 발밑에 흙을 골라주듯 책을 읽어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고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디딤돌이었다. 이 이야기들, 심지어 이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 상상물들, 왕자, 나무꾼, 오두막에 사는 정직한 어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생각한다. 그는 아이들이 과거의 삶과 새로운 삶을 모두 가지기를 원했다. 과거의 모든 삶으로부터 나뉠 수 없는 삶, 과거로부터 성장하고 과거를 초월하는 삶, 그리고 또 하나의 삶, 독창적이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삶, 우리를 보호하는 편견과 삶의 형태를 주는 습관을 넘어서는 삶. 그는 아이들이 삶의 하락과 상승을 모두 알기를 원했다. 굴욕 없는 전자와 무지 없는 후자를 말이다. 그는 이 여정을 위해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있다. 마치 이 한 시간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 한 시간 안에 여물을 모두 모아두고 조언을 모두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아이들이 항상 기억할 한 문장을 생각해 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갈 길을 알려주는 그런 하나의 경구. 하지만 그는 그 문장을 찾아내지도, 생각해내지도 못했다. 그들이 소유한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될 텐데 그에겐 그게 없다. 대신 그는 차분하고 감각적인 목소리로 유럽과 눈 오는 러시아, 아시아의 작은 신화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최고의 교육은 오직 한 권의 책을 아는 데서 온다고, 그는 네드라에게 말한다. 순도 높고 균형 잡힌 교육이 거기서 온다고. 그리고 그 책을 항상 가까이하는 데서 위안이 온다고.
?
⋯그는 보드카를 두 잔 마시고 아이들에게 젓가락질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었다.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고 뚜껑이 열렸다. 새우와 완두콩, 닭고기 조림, 밥이 나왔다. 이중생활이란 건 완벽하게 자연스러워. 그는 마름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생각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대해 얘기했다. 황제들의 전설, 베이핑베이징의 옛 이름의 보트 놀이. 네드라는 조심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조심스러워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실수를 할까 봐 두려웠다. 그가 모르고 지나친, 무언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그 무엇, 그게 뭐였을지 생각해보았다. 미숙한 자의 죄의식은 의사 질병처럼 그를 적셨다. 그는 차분하려고, 현실적이려고 애썼다.
98~99
지반은 자기 친구라고, 마르셀마스는 말하곤 했다. 그는 다른 친구가 없었다. 심지어 아내조차 친구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혼할 거였다. 그녀는 너무 신경증적이었다. 예술가는 복잡하지 않은 여자와 살아야 했다. 보나르의 여자처럼 구두만 신고 포즈를 취해주는, 그 나머지는 따라올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나머지란 매일 금방 만들어주는 점심 식사였다. 그게 없이는 일을 못했다.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처럼 더러운 손으로 식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감자와 고기와 두꺼운 빵조각을 먹었다. 그는 유머 감각이 없었다. 자기가 먹는 동안 모든 것이 저절로, 뭔가 예기치 않고 흥미로운 형태로 해결되길 바랐다. 욕조에서 미세한 거품이 다리를 덮을 때처럼.
“케이트, 엄마는 어디 갔냐?” 그가 말했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케이트에겐 배달부 남자애 같은, 절대 상처 받을 수 없는 사람의 권태로움이 있었다. 그녀는 난방도 안 되는 방과 밀린 공과금 속에서 자랐다. 아빠는 떠났다가 돌아왔고, 아빠가 돌아오면 사과나무를 깎아 색칠한 아름다운 새 조각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빠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녀는 그 일부를 기억했다. 아빠가 골라준 색깔 속에서 살았고, 해의 광선을 받듯 그 색들의 광선을 받았다. 찢어낸 스케치북에 발자국이 찍힌 것을 보았고, 자기 방에서 두꺼운 가문비나무 판자 위에 얼굴을 묻고 취해 뻗은 아빠를 보기도 했다. 그녀는 아빠를 배신할 수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는 마치 주먹싸움에서 얻어터지듯, 그렇게 딸 앞에서 패배자처럼 살았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때로 그림에 대해 얘기했고, 나무 가지치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 안에는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의 숭고함이 있었다. 생각들은 눈부실 정도였지만 무학자의 것이었고, 꿈은 거대했다. 버는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가족에게 주었고 그들은 그 돈을 썼다.
119
그날은 모니카가 죽은 날이었다. 다리가 하나뿐이었던 그 아이. 외과 의사가 다리를 충분히 자르지 않았던 거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 다리에 다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두 헛일이었다는 듯이. 그 통증이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 다음에 열이 났고 두통이 왔다. 온몸이 퉁퉁 부어올랐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물론 몇 주가 걸렸다. 결국, 그날 저녁이었고, 비리는 나무를 들이고 있었다. 한 아름 안고 있어 나무껍질이 소매에 걸렸다. 그가 잔 나무들을 모아 둑을, 겨울을 날 작은 흉벽을 만들려 할 때 아이가 죽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직장에 있었다. 어머니는 접의자에 앉아 아이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아이는 갑자기 가 벼워졌다. 훨씬 가벼워진 채로, 무서울 정도로 사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 아이를 떠났다. 순진무구함, 울음, 아버지와의 의무적인 놀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이 모든 것에 무게가 있었다. 그것들은 떠나가고 용해되어 먼지처럼 흩어졌다.
날들이 온기를 잃었다. 때로 정오가 되면 작별 인사를 하듯 한두 시간 여름 같다가 금세 온기가 사라졌다. 근처 과수원 가판대에는 진한 과즙으로 가득 찬 단단하고 노란 사과들이 놓였다. 이가 닿으면 사과는 몸을 터뜨렸고, 언쟁 같은 흰 조각들이 이에 남았다. 멀리 있는 밭,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축축한 대지에선 아직 토마토가 덩굴에 달려 있었다. 언뜻 보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토마토는 그 안에서 숨겨지고 보호되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거였다.
121
“결혼에 관해 내가 좋아하는 점들이 있어. 그 익숙함이 좋아.” 네드라가 말했다. “마치 타투 같아. 어느 순간 너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피부에 새겨져 있으니 없앨 수도 없고, 심지어 했는지조차 몰라. 나는 좀 구식인가 봐.”
127
“진짜로 친하고,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고, 나 자신과 다른 행동을 하라고 절대로 요구하지 않는, 그런 사람하고 함께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요? 우리가 그랬어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이브가 말했다.
“물론 다른 문제들도 있었죠.”
네드라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조용하고 권태로워 보였다. 네드라는 그의 셔츠 소매가 더럽고 손은 깨끗하다는 사실을,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유태인이었다. 그녀는 보자마자 알았다. 그들에겐 같은 비밀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남편과 비슷했다. 실제로 비리가 숨기고 있는 또 하나의 비리 같았다. 어찌어찌 피해 간 그의 부정적 자아.
?
어떤 이들은 절망감이 너무 깊어서 가만히 있을 때에도,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삶을 소모했다. 나중을 위해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아껴둘 필요를 못 느낀다. 매 시간이 추락이었고, 모든 것을 던져버리려는 시도였다.
145
이브가 웃었다. 그녀는 치아 뒤에 금을 해 넣었고, 그래서 그 가장자리가 검어 보였다. 창녀의 이처럼 검게 빛났다. 그녀는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웃겼다. 그녀의 삶에는 단단한 기반이 없었다. 그냥 애매하게 열중했고 사는 걸 가볍게 여겼다. 그 웃음들, 그 근심 없는 분위기, 그녀의 매력은 거기 있었다.
169
그는 그녀를 안고 바다로 갔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그의 팔 위로 그녀의 긴 다리가 흔들거렸다. 파도는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계단 아래서 짖던 핫지도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이브도 나이가 들었다고 네드라는 생각했다. 아직 배는 안 나왔지만 피부가 늘어졌다. 허리도 굵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그녀를 사랑했고, 그래서 더 사랑했다. 이마에 슬슬 나타나는 가는 주름마저 아름다웠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그녀의 머리끝은 젖었고 몸은 물로 반짝였다. 젖은 팬티 위로 치구가 비쳐 보였다. 그녀는 애정에 푹 빠져 아노드에게 기댔다. 그의 스웨터를 입었는데, 스웨터가 엉덩이를 덮어 그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허리로 그가 팔을 둘렀다. “문제는,” 그녀가 말했다. “어쩔 수가 없다는 거야. 나는 유태인을 좋아하니까.”
174~175
그해 그들의 친구는 마리나와 제럴드 트로이였다. 마리나는 배우였다.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에 출연했었다. 그녀의 눈은 강렬한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부자였다. 오래된 부자였고, 부유함이 구석구석에서 빛났다. 피부와 세련된 미소에서까지.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 헬스클럽에 갔는데, 레온이라는 늙은 그리스인이 트레이너였다. 여든이나 된 그의 팔은 아직 단단했고 머리는 새하얬다.
네드라도 거기 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스포츠엔 관심이 없었지만 처음 몇 시간을 해보고는, 찻길 위 더러운 창문이 있는 텅 빈 헬스클럽에서 나이 든 트레이너의 헌신적이고 친구 같은 태도를 보고는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워실은 깨끗하고 넓었다. 초록색 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몸은 깨어났다. 갑자기 몸 안에 깊은 강인함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트레칭 할 때, 거꾸로 매달릴 때, 근육이 더워지고 이완되었다는 걸 느낄 때, 젊은 육상 선수가 된 것처럼 느낄 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이 몸을, 언젠가는 자신을 배반할 이 몸을 사랑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아니, 그녀는 그걸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몸을 배반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몸의 불멸성을 느끼는 시간들이 있었다. 서늘한 아침, 또는 여름밤 침대 커버 위에 옷을 벗고 혼자 누워 있을 때, 목욕할 때, 옷을 입을 때, 섹스하기 전, 바다에서, 피곤한 팔다리로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193
집은 그들 위로 빛에 잠긴 채 서 있었다. 박공지붕 양 끝에 굴뚝이 있었고 슬레이트 지붕은 비에 탈색되어 회색이었다. 커다란 헛간처럼 집은 날씨에 얼룩져 있었고, 바다를 건너온 배 같았다. 주춧돌을 따라서 쥐가 살았고 집의 끝자락에는 잡초가 자랐다.
광대한 날이 그들을 에워쌌다. 땅은 따뜻했고 강은 햇살에 반짝거렸다.
?
⋯⋯미풍이 목소리를 날렸고 5미터만 떨어져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대화가 보이기만 하고 들리지는 않았다.
?
당신은 무명이 아니야, 사람들이 그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친구들이 있어. 사람들은 당신 작품을 좋아해. 그리고 결국 그는 좋은 아빠였다. 다시 말하면 무능한 남자라는 얘기였다. 진정으로 좋은 것, 훌륭한 것은 달랐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고 살인적인 것이다. 다른 공격 행위처럼 피해자가 생겼다. 간단히 말해 그건 정복이었다. 우리는 모호해야 하고, 우리는 부드러워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의도야 어쨌든, 눈부신 비전 속에서 사람들을 짓누르게 되는 것이다. 실패자는 바보고 허약한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사람에게 미덕이란 없었다.
209
그날 밤 네드라는 운전을 했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쯤 출발했다. 라디오에서는 시벨리우스가 쾅쾅 울렸고 바람이 차를 때렸다. 떨리는 가슴으로 조선소와 정제소를 지나쳤고, 허름한 마을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를 먹여 살리던 산업이 있는 곳이었다. 차는 양방향으로 이어졌다. 전조등은 더욱 밝아졌다. 어둠이 내린 것이다.
그녀는 쉬지 않고 달렸다. 라디오가 지지직거렸고, 주파수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음악이 들렸다가 유령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가, 마치 낡아가는 거대한 차양이 드리운 것 같았다. 가난한 동네에, 물이 새는 지붕들 아래 있는 것 같았다. 값싼 광고판과 값싼 감상과 무분별한 소음으로 넘치는 동네에. 이 혼돈이 귀를 채웠고 맞은편의 전조등이 눈을 찔렀다. 까만 나무 위의 하늘이 도시들과 함께 빛났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달렸다. 옛날 동네들, 지치고, 배타적인, 팔고 되팔렸던 땅으로, 깊은 밤 속으로 달렸다. 길은 텅 비었다. 서스쿼해나 강을 건널 때 처음으로 졸음이 엄습했다. 운전하는 길은 꿈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생각했고 되찾아갈 과거를 생각했다. 끝없는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무기력함과 절망을 느꼈다. 벌써 했던 여행을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거였다. 병원의 복도 같은, 블루 마운틴의 길고 하얀 터널을 지나쳤다. 그러곤 투스카로라였다.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 이름들은 그녀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리라 확신하면서.
238~239
가정이 화목해도, 가족끼리 항상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프랑카와 얘기하는 걸 즐겼고, 프랑카에 대해서도 얘기를 잘했다. 현재는 과거의 반영이라는 맥락에서, 이 여자가 바로 자기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딸을 통해 삶을 발견하고, 두 번째로 맛보고 싶었다.
휴가 중 하루는 데이나 집에서 파티가 있었다. 데이나의 얼굴엔 벌써 알 수 없는 무감각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거의 적개심에 가까웠다. 하지만 결국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네드라의 말대로 아빠는 주정뱅이에 엄마는 바보였다. 네드라는 그날 밤 칸딘스키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반질거리는 종이로 만든, 무겁고 아름다운 책이었다. 구겐하임에서 전시를 본 후 칸딘스키에 빠져 있었다. 저녁의 조용한 시간, 할 일을 다 한 후에 책을 펼쳤다. 책에서 칸딘스키는 늦게 그림을 시작했다고 했다. 서른 둘의 나이에.
그녀는 이브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이 책 너무 좋아.”
“좋을 것 같았어.”
“이제 막 읽기 시작했어.” 네드라가 말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뮌헨에서 살다가 러시아로 돌아갔대. 십 년 동안 같이 살던 여자를 남겨두고, 이 여자도 화가였다네. 그녀를 다시 본 건 한 번뿐이었대. 상상해봐. 1927년에 열린 전시회에서였대.”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속으로 들어오듯. 그녀는 흥분했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이 그렇듯, 윤이 나게 닦인 문장들이 딱 적당한 때 도착한 기분이었다.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
“우리는 농담도 하죠.” 알바가 말했다. “그렇지, 클레어?”
“가끔씩요.”
그들은 남자와 여자였다. 그 순간 그들은 더 좋아질 수 없는 한 장의 사진 같아 보였다. 정원에 서 있을 배나무와 물이 스민 자갈 깔린 진입로, 다 큰 딸이 가진 문제들까지 그대로 멈추어, 이 커플의 섭정 속에서 평화로웠다.
비리는 이 이미지에 다소 놀란 채로 앉아 있었다. 그 자신이 종종 남들을 놀라게 하던 그런 이미지, 결혼 생활이 가장 순수하고 관대한 형태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연약해짐을, 무기력해짐을 느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 부부의 만족감 속에서 흠을 찾고 싶었지만 그 표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었고, 그 가늘고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녀 뺨의 모양과 그녀의 무릎, 그는 무서웠다. 자신의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공포는 고백할 수 없는 종류였다.
네드라도 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삶은 이기적이고 고립되어야 한다는 증거를, 심지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전혀 모르는 여자가 명백하게 보여준 것이다. 알바 부부는 다른 삶이 아닌 어떤 특정한 삶을 원했고, 운 좋게도 그 삶을 함께 찾았다. 런던의 포토벨로 로드에서 그녀는 건초 색깔의 아름다운 랄리크 크리스털 병을 샀다. 그 병을 클레어에게 선물로 보냈다.
332~333
“어젯밤에 피터와 캐서린 집에 갔었어. 피터는 정말 훌륭해. 물론 당신 안부를 물었고.”
“잘 지낸대?”
“음, 뭐, 그 사람들은 아주 신기해. 서로 애정은 대단하지 않은 것 같은데 헌신적이야.” 그가 잠시 멈췄다. “우리도 그랬던 것 같지만.”
“뭐, 다들 그렇지.”
“당신은 잘 지냈어?”
“아, 나쁘지 않아. 당신은?”
“나는 가끔⋯⋯ 실제로는 수없이 그리로 날아갈 생각을 했어.”
“아, 비리, 생각은 고맙고, 당신을 보면 반갑겠지만, 하지만 그건⋯⋯ 아, 알잖아, 우리는 그러기엔 늦었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아.”
“쉽지 않지.”
그녀는 그의 간청을 지혜롭게 넘겼다. 그게 그에게는 언제나 놀라웠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기 위해서 더 붙어 있고 싶었다.
“이 주 있으면 당신 마흔넷이 되네.” 그녀가 말했다.
“그래.”
“당신 생일 함께 못 있겠네.”
“마흔넷.” 그가 말했다. “이제 그 나이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 같아.”
“쉬운 부분은 지났지.”
“쉬웠어?”
“우리는 지하의 강으로 들어가고 있어.” 그녀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응, 알아.”
“그게 우리 앞에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용기조차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당신 알마 말러 또 읽고 있어?”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예리했다.
지하의 강, 낮아진 천장은 축축해지고, 물은 어둠 속을 흐른다. 공기는 습하고 차가워졌고 수로는 좁아졌다. 빛과 소리는 여기에 없다. 커다랗고 건널 수 없는 널빤지 밑으로 물살이 흐르기 시작한다.
“용기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건 무슨 말이야?”
“용기, 지혜, 아무것도 안 돼.”
“네드라⋯⋯.”
“응.”
“아무 일 없는 거야?”
"물론.”
“아니, 정말로 말이야. 네드라, 알지, 나는 항상⋯⋯ 여기 있어.”
“비리, 나는 괜찮아.”
“당신 행복해?” 그가 물었다.
그녀는 웃었다. 행복. 그녀는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351~353
⋯⋯집에서는 맨 다리로, 맨발로 지냈다. 팔과 다리는 그을었고, 눈은 같은 회색이었고, 입술은 매끄럽고 창백했다. 안온한 날들. 우정이 있었고, 근심은 햇빛에 여과되었고, 해복했다. 아침에 그 집 앞을 지나가면, 아름다운 여자가 꽃에 물을 주고 딸이 그 옆에서 길고 하얀 고양이를 팔에 안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들이 집을 비웠을 때는, 창문은 조용하고 나무 상자위에 손바닥만 한 수영복들이 널려 있고, 검은 머리의 울새들이 비바람을 맞은 몸으로 잔디 위를 빠르게 날았다.
그들이 바깥에서 볕을 쬐는 곳에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작은 노란 벌들이 치즈 껍데기를 먹고 있었다. 네드라는 양 손바닥을 볕에 달궈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8월 초였다. 바다는 노래를 했다. 아침에, 점심 직후 텅 빈 시간에, 바다 위로 은색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 몇이 소리를 지르며 놀았다.
그들은 피터와 캐서린의 집을 방문했다. 커다란 나무 아래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그들은 앉아서 비리 얘기를 했다. 네드라는 드레스의 단추를 몇 개 풀고 배를 문질렀다. 소화에 좋다고, 그녀가 말했다. 머리 위 어둠 속으로 비행기가 희미한 소리를 흘리며 지나갔다. 별들 사이로 그 불빛이 지나갔다.
“지난 달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 좀 지쳐 있어요⋯⋯ 사는 데. 그동안 쉽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가요?” 피터가 말했다.
“추측은 종종 틀리니까⋯⋯.”
“맞아요, 하지만 당신과 비리든, 누가 됐든 헤어질 때는 통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그 잘라진 조각이 똑같지 않은 거죠. 둘 중 한 명이 그 중심부를 가져가죠.”
“비리는 그 사람 일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 신성한 일부를 가져갔어요. 당신은 살고, 행복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러지 못해요.”
“아빠 요즘 훨씬 나아지셨어요.” 프랑카가 말했다.
“우린 본 지가 한참 됐죠.”
“훨씬 좋아지셨어요.” 그녀가 안심을 시켰다.
“아직 그 집에 살아?” 캐서린이 물었다.
“아, 그럼요.”
그들은 음식과 옛날 친구 얘기, 유럽과 읍내의 상점들, 바다얘기를 했다. 중요한 얘기는 나중에 꺼내는 사업가처럼 피터가 물었다. “네드라, 당신은 어때요?”
“저요?”
“그래요.”
“글쎄요, 오늘 저녁을 너무 잘 먹었고, 내 침대는 편안하고⋯⋯.”
“그래요⋯⋯.”
“생각 중이에요. 그런 질문에 답하는 건 좀 익숙하지가 않네요. 특히 나를 이해할 사람이라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가 어때 보여요?”
“피터” 캐서린이 설명을 했다. “네드라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거야.”
“실제로요,” 피터가 말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지만, 당신은 좋아 보여요. 전과 전혀 다름없이.”
“전과 다름없다⋯⋯ 아녜요. 누구도 전과 같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옮겨 가고 있어요.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에요. 그리고⋯⋯ 며칠 전 나는 이상한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끝은 까만 망토를 입은 해골이 아니었어요. 마지막에 나를 데려간 건 캐딜락을 탄 뚱뚱한 유태인 남자였어요. 그 시가를 피우는, 매일 보는 종류의 남자. 차는 새 차였고 창문은 닫혀 있어요. 그는 아무 할 말이 없어요. 너무 바쁘니까. 그러곤 그와 함께 가는 거죠. 그게 다예요. 어둠 속으로. 내가 왜 이리 말이 많죠?” 그녀가 물었다. “브랜디 때문인가 봐요. 이제 가야 해요.”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녀의 삶은 잘 보낸 한 시간 같았다. 그 비결은 그녀가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화된 자신을 느꼈다. 날들은 바닥나지 않는 채석장에서 캐내는 돌 같았다. 그 안에는 책과 사소한 볼일들, 해변, 그리고 가끔씩 오는 우편물이 있었다. 그녀는 볕에 앉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우편물들을 읽었다. 마치 해외에서 날아오는 신문을 읽듯.
?
비리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주머니에서는 썩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애매한 프로젝트와 약속들이 있었지만, 정작 할 일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한곳에 붙어 있지 못하고 죽어가는 벌레처럼 미끄러져 내렸다. 힘도 없고, 이유도, 싸울 기력도 없었고, 그 시간들 속에서 흔들리고, 비척거렸다. 아, 그저 미친 사람처럼, 신자처럼 죽음을 향해 뛰어갈 수 있다면, 정신이 혼미해진 채, 멍하게, 사랑에게 뛰어가던 그 빠른 걸음으로, 그러다가 어느 조용한 이른 오후, 어딘가 앉아서 신문을 펼치는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415
⋯⋯ 죽음의 기미가 느껴졌고, 연약해 보였다. 생각할 수조차 없는 사실이 벌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노인이 될 것이다. 그는 믿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고 허락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인생의 의미가 아니던가.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아모레?”
“응.”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가운을 입었다. “그래, 나 괜찮아.”
“이리 와요.” 그녀가 말했다. “차를 만들어드릴게요.”
날이 가듯 더디긴 했지만 그는 나아졌다. 어느 시점이 되자 테라초 바닥의 차가움도, 찢어지는 듯한 전화벨 소리도, 가뭄처럼 찔찔 나오는 수돗물도 거슬리지 않았다. 끝도 없는 우울증을 겪은 후, 불면의 밤들을 보내며 가망 없는 비참한 삶 속에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나니 오히려 천천히 머리가 맑아졌고, 심지어 차분해졌다. 다시 읽고 생각할 수가 있었다. 날이 조용히 밝아왔다. 지나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조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자신에게 남은 것을 챙겼다. 자신의 팔다리와 얼굴을 만지며, 지나간 일을 잊는 중요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일상에 행복해하는, 평화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감사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 완벽하게 실감은 나지 않았다. 기차에 앉은 사람이 창밖의 풍경을 보는 듯했다. 때로는 생생한 풍경이, 때로는 텅 빈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416~417
우체통에 또박또박한 글씨가 쓰인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그는 바로 필체를 알아봤다. 복도에서 봉투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비리에게⋯⋯.’ 이렇게 멀리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어제처럼 와 닿았다. 그의 눈이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항상 모든 게 실수였다고, 마음을 바꿨다고 그녀가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녀의 그 말에 즉각 굴복의 대답을 하지 않을 날은 단 하루도, 한 시간도 없었다. 마치 출전 명령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퇴역한 지 오래된 군인 같았다. 아무것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다시 뛰는 가슴을 안고, 장비를 꺼내 늘어놓고, 결국엔 집과 고향을 떠나는 노병.
그녀는 1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다. 필요하다고, “살다 보면 그렇잖아”라고 했다. 꼭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1만 달러. 리아에게는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지 뻔했다. 이탈리아 삶에서의 돈의 중요성, 그 엄격함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청소하러 오는 여자에게 일주일에 2만 리라약 10유로정도 주었고, 베네토 거리에서 파는 구두의 값은 돈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로마는 남부의 도시였고, 자본은 돈과 부라는 쇠도끼 위에 놓여 있고, 은행은 영안실 같았다. 이탈리아 사람은 돈이라면 개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리아가 편지를 읽었다. 말이 없고, 싸늘했다.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그럴 수 없어요. 왜 돈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 사람 뭘 요구한 적 없었어.”
“그 여자 당신을 빨아먹을 거예요. 그 여자 돈에 신경 안 쓴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그냥 물 쓰듯 하는 거라고요. 지금 돈을 주면, 육 개월 후에 또 달라고 할 거예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의심을 하고 경계를 품은 이 여자에게는 아니었다. 가냘픈 이 여자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세상사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을 먹을 때 그녀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음울한 포크 소리가 공기에 걸렸다.
“아모레, 내가 부탁 하나 할게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그는 알고 있었다.
“맞아요, 물론 당신은 알고 있지요.” 그녀가 동의했다.
그녀는 의기소침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이 다른 여자의 존재를 인정하듯이.
“보내지 말아요.” 그녀가 간청했다.
“리아, 왜?”
“보내지 말아요.”
“알았다고.” 그가 말했다.
“아모레, 날 믿어요. 내가 알아요.” 그녀는 냉소적인 견해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몰라.”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부엌으로 그릇을 가져갔다. 그리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