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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그 뒤로 우리 대화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조심스럽게 흘러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그즈음 연애사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고 상의하던 나는 최대한 말수를 줄여 관계라는 게 참 어려지, 사람 사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고독하지, 인생이 너무 쓸쓸해 같은 말들을 내놓았고 그때마다 영건은 그런 마음에 알맞은 보아 노래를 선곡해 이어폰 한쪽을 나눠 주고 함께 듣곤 했다. 늘 있는 좌석버스의 난폭 운전 속에 그렇게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의 머리카락이나 소매나 어깨가 스칠 때면 나는 이런 계절을 보내면 보낼수록 언젠가는 이 순간의 기억들을 물리적 통증에 가까운 아픔을 각오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울 수 없으리라 서늘하게 예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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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그 뒤로 우리 대화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조심스럽게 흘러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그즈음 연애사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고 상의하던 나는 최대한 말수를 줄여 관계라는 게 참 어렵지, 사람 사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고독하지, 인생이 너무 쓸쓸해 같은 말들을 내놓았고 그때마다 영건은 그런 마음에 알맞은 보아 노래를 선곡해 이어폰 한쪽을 나눠 주고 함께 듣곤 했다. 늘 있는 좌석버스의 난폭 운전 속에 그렇게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의 머리카락이나 소매나 어깨가 스칠 때면 나는 이런 계절을 보내면 보낼수록 언젠가는 이 순간의 기억들을 물리적 통증에 가까운 아픔을 각오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울 수 없으리라 서늘하게 예감하기도 했다.  
 
  그러다 비가 와서 차창이 돋아난 물방울로 가득 찬 날에 나는 영건이에게 앞으로 어떤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아? 하고 물었다. 누군가에게 불쑥 사랑에 대해 묻는 건 누구나 아는 교본 대로 일정한 탐색용이었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영건이는 불쑥 나는 아무래도 어딘가 상한 사람들만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poem>
 
  그러다 비가 와서 차창이 돋아난 물방울로 가득 찬 날에 나는 영건이에게 앞으로 어떤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아? 하고 물었다. 누군가에게 불쑥 사랑에 대해 묻는 건 누구나 아는 교본 대로 일정한 탐색용이었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영건이는 불쑥 나는 아무래도 어딘가 상한 사람들만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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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7일 (토) 01:38 기준 최신판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은이),곽명주 (그림)마음산책2018-10-30

99

은지는 야 씨발아, 연락 안 해, 라고 썼다가 지웠다. 야, 너네 엄마 내일 올라오신댄다, 라고 썼다가 다시 지웠다. 야, 너한테 택배 왔다, 뭔가 근사해 보이는데 누가 헤드폰을 보낸 것 같은데 그러니까 닥터 드레, 라고 했다가 지웠다. 5분 안에 연락 안하면 우리 사이 끝난 걸로 알겠어, 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날 화내서 미안해, 와 별일 없는 거지, 라는 말도 지웠다.
 대신 은지는 공부를 했다. 9급을 공부했다. 남수는 7급이 아니라면 비전이 없다지만 은지는 그런 말 따위는 1도 안 믿었다. 남수가 그렇게 말할 때 아, 그런 말은 1도 안 믿어, 라고 했다. 그러면 남수는 9급은 정말 아니다, 적어도 최소한 7급은 되어야 한다, 7급은 되어야 밥도 먹고 살고 결혼도 하고 나중에 오십도 보고 육십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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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우리 대화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조심스럽게 흘러갔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그즈음 연애사를 시시콜콜하게 털어놓고 상의하던 나는 최대한 말수를 줄여 관계라는 게 참 어렵지, 사람 사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고독하지, 인생이 너무 쓸쓸해 같은 말들을 내놓았고 그때마다 영건은 그런 마음에 알맞은 보아 노래를 선곡해 이어폰 한쪽을 나눠 주고 함께 듣곤 했다. 늘 있는 좌석버스의 난폭 운전 속에 그렇게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의 머리카락이나 소매나 어깨가 스칠 때면 나는 이런 계절을 보내면 보낼수록 언젠가는 이 순간의 기억들을 물리적 통증에 가까운 아픔을 각오하지 않고는 도저히 지울 수 없으리라 서늘하게 예감하기도 했다.
 그러다 비가 와서 차창이 돋아난 물방울로 가득 찬 날에 나는 영건이에게 앞으로 어떤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아? 하고 물었다. 누군가에게 불쑥 사랑에 대해 묻는 건 누구나 아는 교본 대로 일정한 탐색용이었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영건이는 불쑥 나는 아무래도 어딘가 상한 사람들만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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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다. 못할 게 뭐 있나, 맞제?”
 삼촌은 다시 한 번 아버지와 통화할 수 있게 잘 설득해달라고 부탁한 뒤 전화를 끊었다. 과연 내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쯤 말은 걸어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 과거의 불행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버지일 뿐 정작 삼촌은 거기서 걸어 나와 해운대에서 가장 맛있는 족발집 사장님이 되었다고. 삼촌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순간조차 블루지한 템포에 영혼을 맡긴 채 불행에 대한 체념도 외면도 아닌, 비비 킹의 대표곡처럼 인생의 스릴을 생각하면서 그 시간을 통과할 줄 알았던 소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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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종이책을 사고 별로면 다시 알라딘 중고서적에 내놓고 하는데, 이 책은 ‘영건이가 온다’편을 읽자 마자 ‘아 이건 계속 가지고 있어야겠다’ 확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