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9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poem>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지은이)개마고원2013-12-06</poem> <h3>26</h3> <poem>'''비정규직인 건 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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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진심은 애석하게도 타인을 평가하는 애꿎은 집착으로 변질된다. 개인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기준으로 모든 세상사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십대의 눈을 만들어버렸고, 그 이십대의 눈은 곧 자기계발서 자체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십대 스스로 그 시각에 갇혀, 결국은 다시 자기계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십대가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던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 싫어서다. 이것이 자신을 자기통제적인 자기계발로 몰아붙이게 하고, 덩달아 ‘시간관리’에 대한 신념은 더욱 강화되며, 이 신념은 타인을 평가하는 고정관념이 되어 버린다. 이제 이십대는 살아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극단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확언컨대, 이는 이십대 본인들에게 더 큰 부메랑이 되어 일상의 순간순간을 지배하는 ‘칼날’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돌아와 있다.</poem> | 그러나 이 진심은 애석하게도 타인을 평가하는 애꿎은 집착으로 변질된다. 개인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기준으로 모든 세상사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십대의 눈을 만들어버렸고, 그 이십대의 눈은 곧 자기계발서 자체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십대 스스로 그 시각에 갇혀, 결국은 다시 자기계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십대가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던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 싫어서다. 이것이 자신을 자기통제적인 자기계발로 몰아붙이게 하고, 덩달아 ‘시간관리’에 대한 신념은 더욱 강화되며, 이 신념은 타인을 평가하는 고정관념이 되어 버린다. 이제 이십대는 살아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극단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확언컨대, 이는 이십대 본인들에게 더 큰 부메랑이 되어 일상의 순간순간을 지배하는 ‘칼날’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돌아와 있다.</poem> | ||
<h3>91~93</h3> | <h3>91~93</h3> | ||
− | <poem> | + | <poem>⋯⋯나는 2009년도와 2012년도에 걸쳐 ‘대학생들의 가치관’을 조사하면서 이를 확인한 바 있는데, 그런 연대의식이 중요하다고 답한 대학생들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외국어능력’이 중 요하다고 응답한 대학생은 90%가 넘지만 말이다. |
− | + |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자기계발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고자 했다. 고통이란, 한 개인이 특정한 현상에 반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A가 아파할 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을 이겨낸 B가 있 다면 A의 고통은 참아야 되고, 이겨내야 하고, 사회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심성 여린 A가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경험한 점장의 횡포에 대한 서러움은, 늘 강한 심성을 가진 덕분에 그보다 더한 것도 참아내는 B가 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먹 한 대 맞은 고통은 두 대 맞은 고통보다 그저 ‘낮은’ 순위로 이해될 뿐이다. | |
− | + |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은 타인의 상황을 늘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 근거로서 저자 자신, 혹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으로 설정 된다. 당연히 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총량은 무지막지하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 그런데 성공한다. 청소부를 했던 사람이 대통령도 되었고(이명박), 빈농의 자식이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고(정주영), 비닐하우스 집에 살면서도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는(양학선) 식이다. 자기계발서의 저자는 그런 스토리 안에서 아파하는 이십대를 질타한다. 그 정도 수준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웬만한 고통이니까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거라면서.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주인공들을 접할 때마다, 이십대들은 십중팔구 ‘지금 내가 힘든 건 힘든 축에도 못 끼는구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취업준비 어렵다는 하소연은 한순간에 ‘입 닥쳐야 할 징징거림’이 된다. 이는 자연스레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저하시킨다. 그렇게 고통의 비교 법칙이 이십대를 통제한다. | |
− | + | 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흥미로운 건, 앞선 장에 등장한 이십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 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이 또 어딨는가. | |
− | + |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들의 호소는 자신들의 고통에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기에 나타난 절규나 다름없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아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돼버린 셈이다. 자신을 아무도 역지사지해주지 않는데, 자신이 어찌 역지사지의 입장을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이들은 고통의 비교 법칙을 그대로 적용했을 뿐이다. 취업대란이란 말이 상징하듯, 이십대들이 마주하게 되는 고통 자체가 객관적으로 엄청 늘어나 있다. 신입생 때부터 해야 될 일은 상상을 초월하며, 게다가 그 보상마저 확실하지 않으니 심신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비정규직의 목소리에 공감할 여유가 있을까?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도 ‘나만큼’ 힘들진 않은 것 같다고 느낀단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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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em> | + | '''둘째: 편견의 확대재생산''' |
− | <h3> | + |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poem> |
− | <poem> | + | <h3>125</h3> |
− | <h3> | + | <poem> 책에서는 논의를 가장 심플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름값’이 높은 대학들을 소개했지만, 내가 여러 대학에 강의를 다니면서 확인해보면, 이 속성은 어떤 대학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 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난리가 난다. 그렇게 4년제는 다시 2년제를, 2년제는 또 같은 기준에 근거해서 자기들 내부를 쪼개고 줄세운다. 모두가 이렇게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다. 1등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사회 구조가 그 엄청난 불공정성에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것은 이처럼 모든 사회적 구성원들이 이 구조를 적극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의 피해자들이 가장 충실한 구조의 유지자로 기여하기에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나간다. </poem> |
− | <poem> | + | <h3>168</h3> |
− | <h3> | + | <poem> 앞서 여러 경우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 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명문대든 아니든 내가 만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이 모든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이해했다. |
− | <poem> | + | 흔히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한다. 소비사회에서의 개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부류인지를 드러낸다. 오늘날 이십대들이 대학이라는 맥락을 소비하는 방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이 학력을 근거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갖는 모습은 싸구려를 부끄러워하고 명품을 가졌을 때 당당해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poem> |
− | <h3> | + | <h3>180</h3> |
− | <poem> | + | <poem> 경영학이 ‘보편적’ 학풍으로 존재한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자기계발 시대가 빚은 지독한 학력위계주의 모습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사실상 기업의 논리를 체득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사고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재해석하는 일이 인문사회 학문에 비해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말하자면 ‘스스로 해석하라!’ ‘상상력을 발휘하라!’ 등의 주문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
− | + | 경영학과의 수업 풍경은 전국 모든 대학이 사실상 거의 같다고 보아도 무방한데, 이는 기업에서 뽑고자 하는 표준적인 인재를 만들기 위한 ‘맞춤식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재무회계를 배웠는데 대학마다, 또는 어떤 교수이냐에 따라 ‘다르게’ 배웠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경영학에서는 독특하게 해석한다느니 하는 발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주어진 명제를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지 이를 의심하는 비판적 사고력은 위험하다. (하략)</poem> | |
− | + | <h3>182</h3> | |
− | + | <poem> 이십대가 구원을 기다리는 ‘88만원세대’로 구성되는 과정은,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선택 무능력’의 징표로 이해되고 있는 ‘최하층계층’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한 것과 흡사하다. 쉽게 말하면, 대중매체에 이른바 휴먼다큐나 휴먼드라마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불쌍한 사람들’의 무능력한 모습이 반복적으로 비춰지면서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 동정심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에는 “저러니까 가난하지”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poem> | |
− | + | <h3>194</h3> | |
− | + | <poem> 그 전에 먼저 말해둘 것은, 사실 어떤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논할 때 “그래서 대안이 뭔데?”라고 묻는 것이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라는 자기계발 담론에 따르자면 가급적 기존의 룰에 충실한 것이 개인에게 훨씬 이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를 바꾸는 건 힘들고 불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개인에겐 큰 손해다. 자연히 자기계발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확실한 대안이 없으면 굳이 문제제기하지 않는 태도가 일상화된다. </poem> | |
− | + | <h3>200</h3> | |
− | + | <poem> | |
− | + | [[image:Seperator200.png]] | |
− | <h3> | + | </poem> |
− | <poem> | + | <h3>221~225</h3> |
− | + | <poem> '''CPA의 사회학''' | |
− | + | 아무리 그래도 경쟁 사회에서 차별 대우는 불가피한 일이고, 그 객관적 기준으로 ‘능력’만한 잣대가 어디 있겠느냐는 반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학력위계주의의 처참한 실상을 강의시간에 언급할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서 “능력 자체에 차이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죠. 고시처럼 오로지 성적만으로 뽑는 시험에서도 학교서열에 따라 합격률이 다르잖아요” 하는 반론을 많이 들었다. | |
− | + | 나는 학교별 역량 차이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고시 합격률, 대기업 합격률 순위는 대학서열에 거의 비례한다. 하지만 그 수치가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일 수는 없다. 왜? 그런 차이에는 이미 불공정한 과정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 |
− | + | CPA(공인회계사) 시험에서 합격을 결정하는 데 ‘학교이름’은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고 점수대로 당락이 결정될 뿐이다. 내가 만난 재준이와 범진이는 이 시험을 준비했다. 재준이는 서울 상위권대에 다니고 있었고, 범진이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다녔다. 이들은 준비한 첫 해 둘 다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재준이는 그 이듬해에 2차까지 합격해서 지금은 연봉 7000만 원을 받으면서 굴지의 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범진이는 그 다음해에 시험 자체를 포기했다. 그 이후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 지금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되어 본봉 120만 원에 인센티브에 따라 아주 운이 좋으면 300만 원 정도 번다. 자, 이 두 명의 현재 삶은 공정한 경쟁의 대가일까? CPA 시험에 학력 변수가 개입하지 않았으니, 이 결과는 공정한 걸까? | |
+ | 모든 시험이 그러하듯이, CPA 시험 역시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기획단계와 실제 결심 및 준비단계 그리고 응시 및 실패했을 시 재도전의 순으로 진행된다. 재준이는 최초 결심부터가 매우 자연스러 웠다. “넌 언제쯤부터 준비할래?”라는 말을 경영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교수들은 강의중에도 “여러분 같은 인재들은⋯⋯” “우리 학교 정도면⋯⋯” 하면서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렇게 결심을 하니 부모님들은 “그래 넌 충분히 될 거야!”라고 다독여주신다. 그러나 범진이는 달랐다. 일단 그 학교에서는 아무도 CPA에 관심이 없었다. 정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무슨 CPA 준비냐”는 빈정거림이 더 많았다. 부모님도 시큰둥하신다. 사실 부모님은 그게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셨다. | ||
+ | 본격적으로 들어선 시험 준비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재준이는 학교의 최첨단 신축건물 안에 있는 고시반에 들어갔다. 샤워시설은 물론 휴식을 위한 배려도 잘 되어 있다. 오직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학교에서는 노량진에서 우수한 강사를 초빙해 주기도 한다. 동문선배들이 찾아와서 회식자리를 만들고 격려해준다. 이 자리에서 매우 유용한 수험정보들도 얻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험 준비는 착착 진행된다. 심지어 연애를 해도, 축구를 해도, 영화를 보러 가도 그 고시반 학생들과 함께한다. 그렇게 하루 24시간 자체가 그 시험을 위한 정보가 돌고 도는 의미 있는 순간이 된다. | ||
+ | 하지만 범진이는 고립무원이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학원을 찾아간다. 오고 가는 시간만 3시간이다. 학원에서는 어느 정도 기초가 있다는 전제하에 수업이 진행된다. 그래서 그건 별도로 준비하려고 하는데 혼자서는 힘들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 닌 채 몇 개월을 보낸다. | ||
+ | 그러다가 1차 시험이 있었고 두 명 모두 떨어진다. 그런데 재준이 주변의 분위기는 재도전을 격려하는 쪽이다. 그는 위축되지 않는다. 불합격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은 “이번엔 연습게임한 거니까, 다음에 붙을 거야!”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분위기다. 교수는 “이번에 대충 어떤 건지 살펴본 거니까, 담에 제대로 하면 잘 될 거야!”라면서, 재준이의 ‘원래 실력’은 그렇지 않음을 강조한다. 대기업 이사인 아버지는 푼돈 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준비하라!” 면서 전혀 실망하지 않고,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1년을 다시 준비한 재준이는 그 다음해에 합격했고, 지금은 ‘빅4’에 해당하는 회계 법인에 있다. | ||
+ | 하지만 범진이는 떨어졌을 때 가족들 반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솔직히, 좀 힘들지 않겠니? 아버지가 지금 아프신데⋯⋯”라면서 재도전이 아니라 얼른 돈벌이에 나서길 바란다. 동생은 한술 더 뜬다. “처음에, 내가 뭐랬어? 시간낭비라고 했어, 안 했어? 형도 제발 철 좀 들어. 아버지 지금 저러신데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으면 되겠어!”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한 후배는 이 소식을 듣고 “선배, 이야기 들었는데요, 솔직히 저희가 되겠어요? 괜히 쓸데없는 데 투자하시는 것 아닐까요?”라고 당돌하게 말한다. 이 정도면 사람 미친다. 이 상황에서도 굳은 의지로 버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상 온 세상이 범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넌 원래 떨어질 놈이었어! | ||
+ | 범진이 머릿속에 ‘내가 정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슬슬 다른 길을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범진이는 CPA를 포기하고 공무원 쪽으로 눈을 돌렸다. 5급 행시를 한 2주 정도 생각하다가, 다시 7급 공무원을 한 2개월 고민했고, 최종적으로는 9급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잘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떨어지면 다른 이들이 얼마나 자신을 비웃을지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린다. 결국 범진이는 한 선배의 소개로 작은 제약회사의 영업직 사원이 되었다. | ||
+ | 사회는 늘 최종적인 결과가 곧 개인적 역량 차이가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렇게 CPA 합격률, 고시 합격률, 대기업 취업률, 토익점수를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경쟁력을 그 사람의 절대적 경쟁력으로 간주해버리는 건 분명 불공정한 일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뭉개버린 채 그저 ‘능력 차이’를 이야기한다는 건 부당한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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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과는 정의로운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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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흔히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면 그 결과도 공정한 것이리라 믿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완강히 반대하는 지금의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의 핵심이 이것이다. 기회와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물론 앞서 봤듯이 이건 많은 경우 착시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결과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회와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그 결과가 어떤 모습의 것이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예를 들어, 어떤 사회는 가장이 하루 8시간 정도의 노동을 해서 3인가족 정도가 부자로는 아니어도 평범하게는 살 수 있다. 반면 어떤 사회는 뼈 빠지게 일해도 제 한몸 먹고 살기에도 벅차다. 기회와 과정이 공정했었다 해도, 최저임금 수준이나 노동환경 여건에 따라 그 결과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poem> | ||
+ | <h3>227</h3> | ||
+ | <poem> 출발선과 과정에서 공정했다고 그 결과의 공정성이 저절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마지막 결과된 모습까지 공정해야 그게 공정한 사회인 것이다. 진정한 공정성은, 예컨대 출발과 과정에서 공정을 기했음에도 평범한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열심히 일하고도 3인가족이 최소한의 생활을 꾸려갈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 모자란 만큼을 채워놓는 데 있다. 그래야 결과의 공정성도 이뤄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학업 성취와 계층변수의 강력한 밀착성을 조사한 ‘콜먼 연구서’는, 부모의 계층이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사회에서 그저 교육기회를 주겠다는 식의 선심성 복지로는 사회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나온 결과 그 자체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니, 차별을 줄일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과의 공정성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poem> |
2019년 9월 10일 (화) 13:59 기준 최신판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지은이)개마고원201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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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인 건 자기계발 안한 탓?
문제는 이십대들을 둘러싼 사회 구조적 문제가 과거보다 더 심각하고도 끔찍해진 상황임에도 이들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다는 데 있다. 즉,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에 이들이 묶여 있는데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야!” “너희 때는 원래 그런 거야!”와 같은 말로 이들을 격려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쉽게 말해 “아프니까 청춘이다” 혹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식의 말은 이들의 삶이나 처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눈곱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한단 얘기다.
예컨대 100명의 이십대 중 20명만이 정규직 노동자가 된다고 하자. 여기서 이 20명은 결코 변하지 않는 숫자라 하자. 그럴 경우, 죽도록 고생하면 정규직 된다고 말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생 여부와 상관없이 100명 중 80명은 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못하는 이 전체 ‘파이’의 문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그딴 식의 말로 이십대를 위로한다고 하자. 그럼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는가? 정규직이 되지 못한 21번째 사람부터는 그의 현실이 ‘고생 안 한 결과’로 인식될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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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자기계발과 성공의 간격이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강조되는 것은 늘 자기계발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자기계발의 논리가 사실은 평생 극복만 주문 받는 개인을 만들어버린다. 이십대는 불안하니까 자기계발 담론을 받아들여 위기를 넘어서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불안한 상태는 계속 유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돌이표처럼 갇혀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이 자기계발의 수행에 동참하면 그 어마어마한 참여자들 덕택에 성공하는 ‘하나의’ 사례는 또 발견 될 것이고, 이는 ‘가능성’의 객관적 증거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이 표면화될 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 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 처분 된다. 이렇게 좌절하는 자아가 많아질수록 자기계발서 시장은 더 커진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노골적으로 말해, 자기계발서를 읽었다는 건 ‘낚였다!’의 다른 말인 것이다.
81~84
⋯결국 “회사에서 부려먹기 좋은 사람” 이 되도록 자기 시간을 버릴 줄 아는 게 이 관리기법의 핵심인 셈이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화는 공모전 6개를 동시에 준비하기 위해 커피 믹스를 몇십 개씩 씹어 먹으면서 밤을 지새웠다는 이야기다. 취업 준비를 위해 당연히 위장병이 걸려야 하는, 그리고 그것조차 이겨내야 하는 괴물이 취업하는 사회를 어떻게 ‘좋은 사회’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기계발서들은 이런 상태를 위로한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이십대를 계속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라면서 다독인다. 그렇게 이들은 ‘열정이 있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되며, “내가 옳은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자기위안을 한다. 그런 판인데, 비정규직들이 감히 ‘감사하지는 않고’ 눈에 불을 켜고 파업을 한다? 이십대들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하지 않겠는가.
상식적으로 ‘열정’을 평가받겠다는 건 그 자체가 퇴행적이다. 열정, 의지, 성실성⋯⋯ 이런 건 지극히 주관적 영역에서 평가되는 것이기에, 본원적으로 객관의 잣대를 들이댈 성질이 아니다. 즉, 겉으 로는 ‘시간관리’이겠지만 사실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든 결국 그 평가는 이를 ‘열정’이라 인정하고 받아줄 권한이 있는 누군가의 주관성에 기초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은 이러한 ‘타인의 주관성’에 기초하여 사람 능력을 판단하다가 점차 ‘문서화된 정량적 지표’에 근거를 두는 쪽으로, 즉 평가기준에서 주관성을 줄여가는 쪽으로 발달해왔다. 말하자면 과거처럼 황제가 그렇다고 하면, 동네이장이 틀렸다고 하면 이 규정이 저 규정으로 해석되고, 저 규정이 이 규정으로 둔갑하는 그런 시대에서 조금씩 탈피해왔다. 한데 시간관리를 ‘열정’의 이름으로 둔갑시킨다는 건, 결국 자신을 평가자에게 선택되어야만 하는 ‘을’의 위치에 올려놓는 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을’들의 자리나마 쉽사리 선택되지도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시간관리의 ‘결과’가 없으니 자신을 그나마 선택될 가능성이 있는 ‘대기상태’로 유지시키고자 한다는 거다. 이를 위해서 시간을 ‘나처럼’ 보내지 않은 사람을 결코 ‘나와 같은 급’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다 같은 노동자라고? 큰일 날 소리다.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은 그만큼 ‘덜’ 대우받아야 한 다. 이렇게 ‘엄격한 시간관리’만이라도 평가받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극도의 자기통제로 이루어지는 자기계발을 그 ‘고통’이 약속한 어떤 성과가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수용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만난 수십 명의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취업준비를 ‘자기계발’로 해석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자체를 ‘대단한 만족’으로 즉각 여기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누가 ‘취업 때문에’(사실상) 억지로 해야 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겠는가? 새벽같이 매일 가야 하는 토익학원도 죽을 맛이다. 정말이지 토익점수를 기업에서 평가기준으로 삼지만 않는다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렇지 않다고? 만약 ‘대한민국 어떤 기업에서도 토익점수를 요구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진다면? 그럼에도 진정 ‘자기’계발을 위해 토익학원을 선택할 대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처럼 대학생들은 취업이라는 목적을 위한 엄격한 자기통제식 자기계발이 공허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아를 구속하는 자기계발을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기계발 의 의미와 가치를 격하시키진 않는다고 강조한다. 왜? 그 과정의 결과를 어쨌든 ‘스펙’의 한 줄로 적어야 하니까.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 이렇게 이십대의 자기계발은 끝없이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형태이지만 매우 긍정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취업준비에 찌든 독수리 5형제는 늘 술잔이 여러 번 돌면, “그래도 잘 살고 있는 거죠?”라면서 애써 이 모든 걸 긍정하곤 했다. 그 순간 이들의 눈빛에 비치던 그 간절한 진심이란⋯⋯.
그러나 이 진심은 애석하게도 타인을 평가하는 애꿎은 집착으로 변질된다. 개인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기준으로 모든 세상사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수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십대의 눈을 만들어버렸고, 그 이십대의 눈은 곧 자기계발서 자체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십대 스스로 그 시각에 갇혀, 결국은 다시 자기계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십대가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던 바로 ‘그 사람들’이 되기 싫어서다. 이것이 자신을 자기통제적인 자기계발로 몰아붙이게 하고, 덩달아 ‘시간관리’에 대한 신념은 더욱 강화되며, 이 신념은 타인을 평가하는 고정관념이 되어 버린다. 이제 이십대는 살아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극단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확언컨대, 이는 이십대 본인들에게 더 큰 부메랑이 되어 일상의 순간순간을 지배하는 ‘칼날’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돌아와 있다.
91~93
⋯⋯나는 2009년도와 2012년도에 걸쳐 ‘대학생들의 가치관’을 조사하면서 이를 확인한 바 있는데, 그런 연대의식이 중요하다고 답한 대학생들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외국어능력’이 중 요하다고 응답한 대학생은 90%가 넘지만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자기계발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고자 했다. 고통이란, 한 개인이 특정한 현상에 반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A가 아파할 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을 이겨낸 B가 있 다면 A의 고통은 참아야 되고, 이겨내야 하고, 사회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심성 여린 A가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경험한 점장의 횡포에 대한 서러움은, 늘 강한 심성을 가진 덕분에 그보다 더한 것도 참아내는 B가 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먹 한 대 맞은 고통은 두 대 맞은 고통보다 그저 ‘낮은’ 순위로 이해될 뿐이다.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은 타인의 상황을 늘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 근거로서 저자 자신, 혹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으로 설정 된다. 당연히 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총량은 무지막지하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 그런데 성공한다. 청소부를 했던 사람이 대통령도 되었고(이명박), 빈농의 자식이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고(정주영), 비닐하우스 집에 살면서도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는(양학선) 식이다. 자기계발서의 저자는 그런 스토리 안에서 아파하는 이십대를 질타한다. 그 정도 수준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웬만한 고통이니까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거라면서.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주인공들을 접할 때마다, 이십대들은 십중팔구 ‘지금 내가 힘든 건 힘든 축에도 못 끼는구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취업준비 어렵다는 하소연은 한순간에 ‘입 닥쳐야 할 징징거림’이 된다. 이는 자연스레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저하시킨다. 그렇게 고통의 비교 법칙이 이십대를 통제한다.
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흥미로운 건, 앞선 장에 등장한 이십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 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이 또 어딨는가.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들의 호소는 자신들의 고통에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기에 나타난 절규나 다름없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아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돼버린 셈이다. 자신을 아무도 역지사지해주지 않는데, 자신이 어찌 역지사지의 입장을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이들은 고통의 비교 법칙을 그대로 적용했을 뿐이다. 취업대란이란 말이 상징하듯, 이십대들이 마주하게 되는 고통 자체가 객관적으로 엄청 늘어나 있다. 신입생 때부터 해야 될 일은 상상을 초월하며, 게다가 그 보상마저 확실하지 않으니 심신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비정규직의 목소리에 공감할 여유가 있을까?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도 ‘나만큼’ 힘들진 않은 것 같다고 느낀단 말이다.
둘째: 편견의 확대재생산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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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논의를 가장 심플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름값’이 높은 대학들을 소개했지만, 내가 여러 대학에 강의를 다니면서 확인해보면, 이 속성은 어떤 대학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 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난리가 난다. 그렇게 4년제는 다시 2년제를, 2년제는 또 같은 기준에 근거해서 자기들 내부를 쪼개고 줄세운다. 모두가 이렇게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다. 1등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사회 구조가 그 엄청난 불공정성에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것은 이처럼 모든 사회적 구성원들이 이 구조를 적극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의 피해자들이 가장 충실한 구조의 유지자로 기여하기에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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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여러 경우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 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명문대든 아니든 내가 만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이 모든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이해했다.
흔히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한다. 소비사회에서의 개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부류인지를 드러낸다. 오늘날 이십대들이 대학이라는 맥락을 소비하는 방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이 학력을 근거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갖는 모습은 싸구려를 부끄러워하고 명품을 가졌을 때 당당해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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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이 ‘보편적’ 학풍으로 존재한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자기계발 시대가 빚은 지독한 학력위계주의 모습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사실상 기업의 논리를 체득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사고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재해석하는 일이 인문사회 학문에 비해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말하자면 ‘스스로 해석하라!’ ‘상상력을 발휘하라!’ 등의 주문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경영학과의 수업 풍경은 전국 모든 대학이 사실상 거의 같다고 보아도 무방한데, 이는 기업에서 뽑고자 하는 표준적인 인재를 만들기 위한 ‘맞춤식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재무회계를 배웠는데 대학마다, 또는 어떤 교수이냐에 따라 ‘다르게’ 배웠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경영학에서는 독특하게 해석한다느니 하는 발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주어진 명제를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지 이를 의심하는 비판적 사고력은 위험하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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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가 구원을 기다리는 ‘88만원세대’로 구성되는 과정은,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선택 무능력’의 징표로 이해되고 있는 ‘최하층계층’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한 것과 흡사하다. 쉽게 말하면, 대중매체에 이른바 휴먼다큐나 휴먼드라마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불쌍한 사람들’의 무능력한 모습이 반복적으로 비춰지면서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 동정심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에는 “저러니까 가난하지”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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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먼저 말해둘 것은, 사실 어떤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논할 때 “그래서 대안이 뭔데?”라고 묻는 것이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라는 자기계발 담론에 따르자면 가급적 기존의 룰에 충실한 것이 개인에게 훨씬 이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를 바꾸는 건 힘들고 불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개인에겐 큰 손해다. 자연히 자기계발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확실한 대안이 없으면 굳이 문제제기하지 않는 태도가 일상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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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A의 사회학
아무리 그래도 경쟁 사회에서 차별 대우는 불가피한 일이고, 그 객관적 기준으로 ‘능력’만한 잣대가 어디 있겠느냐는 반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학력위계주의의 처참한 실상을 강의시간에 언급할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서 “능력 자체에 차이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죠. 고시처럼 오로지 성적만으로 뽑는 시험에서도 학교서열에 따라 합격률이 다르잖아요” 하는 반론을 많이 들었다.
나는 학교별 역량 차이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고시 합격률, 대기업 합격률 순위는 대학서열에 거의 비례한다. 하지만 그 수치가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일 수는 없다. 왜? 그런 차이에는 이미 불공정한 과정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CPA(공인회계사) 시험에서 합격을 결정하는 데 ‘학교이름’은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고 점수대로 당락이 결정될 뿐이다. 내가 만난 재준이와 범진이는 이 시험을 준비했다. 재준이는 서울 상위권대에 다니고 있었고, 범진이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다녔다. 이들은 준비한 첫 해 둘 다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재준이는 그 이듬해에 2차까지 합격해서 지금은 연봉 7000만 원을 받으면서 굴지의 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범진이는 그 다음해에 시험 자체를 포기했다. 그 이후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 지금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되어 본봉 120만 원에 인센티브에 따라 아주 운이 좋으면 300만 원 정도 번다. 자, 이 두 명의 현재 삶은 공정한 경쟁의 대가일까? CPA 시험에 학력 변수가 개입하지 않았으니, 이 결과는 공정한 걸까?
모든 시험이 그러하듯이, CPA 시험 역시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기획단계와 실제 결심 및 준비단계 그리고 응시 및 실패했을 시 재도전의 순으로 진행된다. 재준이는 최초 결심부터가 매우 자연스러 웠다. “넌 언제쯤부터 준비할래?”라는 말을 경영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교수들은 강의중에도 “여러분 같은 인재들은⋯⋯” “우리 학교 정도면⋯⋯” 하면서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렇게 결심을 하니 부모님들은 “그래 넌 충분히 될 거야!”라고 다독여주신다. 그러나 범진이는 달랐다. 일단 그 학교에서는 아무도 CPA에 관심이 없었다. 정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무슨 CPA 준비냐”는 빈정거림이 더 많았다. 부모님도 시큰둥하신다. 사실 부모님은 그게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셨다.
본격적으로 들어선 시험 준비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재준이는 학교의 최첨단 신축건물 안에 있는 고시반에 들어갔다. 샤워시설은 물론 휴식을 위한 배려도 잘 되어 있다. 오직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학교에서는 노량진에서 우수한 강사를 초빙해 주기도 한다. 동문선배들이 찾아와서 회식자리를 만들고 격려해준다. 이 자리에서 매우 유용한 수험정보들도 얻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험 준비는 착착 진행된다. 심지어 연애를 해도, 축구를 해도, 영화를 보러 가도 그 고시반 학생들과 함께한다. 그렇게 하루 24시간 자체가 그 시험을 위한 정보가 돌고 도는 의미 있는 순간이 된다.
하지만 범진이는 고립무원이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학원을 찾아간다. 오고 가는 시간만 3시간이다. 학원에서는 어느 정도 기초가 있다는 전제하에 수업이 진행된다. 그래서 그건 별도로 준비하려고 하는데 혼자서는 힘들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 닌 채 몇 개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1차 시험이 있었고 두 명 모두 떨어진다. 그런데 재준이 주변의 분위기는 재도전을 격려하는 쪽이다. 그는 위축되지 않는다. 불합격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은 “이번엔 연습게임한 거니까, 다음에 붙을 거야!”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분위기다. 교수는 “이번에 대충 어떤 건지 살펴본 거니까, 담에 제대로 하면 잘 될 거야!”라면서, 재준이의 ‘원래 실력’은 그렇지 않음을 강조한다. 대기업 이사인 아버지는 푼돈 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준비하라!” 면서 전혀 실망하지 않고,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1년을 다시 준비한 재준이는 그 다음해에 합격했고, 지금은 ‘빅4’에 해당하는 회계 법인에 있다.
하지만 범진이는 떨어졌을 때 가족들 반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솔직히, 좀 힘들지 않겠니? 아버지가 지금 아프신데⋯⋯”라면서 재도전이 아니라 얼른 돈벌이에 나서길 바란다. 동생은 한술 더 뜬다. “처음에, 내가 뭐랬어? 시간낭비라고 했어, 안 했어? 형도 제발 철 좀 들어. 아버지 지금 저러신데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으면 되겠어!”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한 후배는 이 소식을 듣고 “선배, 이야기 들었는데요, 솔직히 저희가 되겠어요? 괜히 쓸데없는 데 투자하시는 것 아닐까요?”라고 당돌하게 말한다. 이 정도면 사람 미친다. 이 상황에서도 굳은 의지로 버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상 온 세상이 범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넌 원래 떨어질 놈이었어!
범진이 머릿속에 ‘내가 정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슬슬 다른 길을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범진이는 CPA를 포기하고 공무원 쪽으로 눈을 돌렸다. 5급 행시를 한 2주 정도 생각하다가, 다시 7급 공무원을 한 2개월 고민했고, 최종적으로는 9급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잘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떨어지면 다른 이들이 얼마나 자신을 비웃을지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린다. 결국 범진이는 한 선배의 소개로 작은 제약회사의 영업직 사원이 되었다.
사회는 늘 최종적인 결과가 곧 개인적 역량 차이가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렇게 CPA 합격률, 고시 합격률, 대기업 취업률, 토익점수를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경쟁력을 그 사람의 절대적 경쟁력으로 간주해버리는 건 분명 불공정한 일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뭉개버린 채 그저 ‘능력 차이’를 이야기한다는 건 부당한 일이다.
결과는 정의로운가?
우리는 흔히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면 그 결과도 공정한 것이리라 믿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완강히 반대하는 지금의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의 핵심이 이것이다. 기회와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물론 앞서 봤듯이 이건 많은 경우 착시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결과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회와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그 결과가 어떤 모습의 것이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예를 들어, 어떤 사회는 가장이 하루 8시간 정도의 노동을 해서 3인가족 정도가 부자로는 아니어도 평범하게는 살 수 있다. 반면 어떤 사회는 뼈 빠지게 일해도 제 한몸 먹고 살기에도 벅차다. 기회와 과정이 공정했었다 해도, 최저임금 수준이나 노동환경 여건에 따라 그 결과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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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과 과정에서 공정했다고 그 결과의 공정성이 저절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마지막 결과된 모습까지 공정해야 그게 공정한 사회인 것이다. 진정한 공정성은, 예컨대 출발과 과정에서 공정을 기했음에도 평범한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열심히 일하고도 3인가족이 최소한의 생활을 꾸려갈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 모자란 만큼을 채워놓는 데 있다. 그래야 결과의 공정성도 이뤄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학업 성취와 계층변수의 강력한 밀착성을 조사한 ‘콜먼 연구서’는, 부모의 계층이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사회에서 그저 교육기회를 주겠다는 식의 선심성 복지로는 사회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나온 결과 그 자체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니, 차별을 줄일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과의 공정성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