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14 공부론(7) - 알면서 모른 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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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8월 21일 (화) 12: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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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수학자 아마다르(Jacques Hamadard)는 〈수학분야의 발명의 심리학에 대한 에세이〉(1975)라는 매우 흥미로운 학제적 연구서에서 여러 천재 수학자들의 발명사례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수학적 영감이 잉태되는 데 필요한 ‘배태기’를 언급한다. 천재적 영감이나 계시를 순간적인 감응의 일종으로 여기던 낭만주의적 상식으로는 낯선 얘기일 수밖에 없다. 벼락같이 다가와야 할 영감에도 임신기가 필요하다?


아마다르는 이 영감의 임신기를 일종의 ‘휴식기’로 묘사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부분은 이 휴식에 앞선 탐색의 성격이다: 이 탐색은 비록 성실하게 행해진 ‘완전히 의식적인 작업’이긴 하지만 아무런 결실 없이 실패한 종류의 것이다. 말하자면, 생산적 영감이 잉태되는 배태기를 위한 정초의 작업이 (어쩌면) ‘성실한 실패’의 경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다.


가령, 그는 푸앵카레(J.H. Poincare, 1854~1912)의 사례를 들어 “최초의 보람없는 작업 ⇒ 휴식 ⇒ 다시 반 시간 정도의 작업 이후에 발견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화학자 티플(J. Teeple)의 경우에는 그 휴식이 ‘모호한 정신 상태 속의 목욕’으로 대치되는데, 목욕을 마치고 반 시간 후에 재개한 연구에 유난히 생산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융(C.G. Jung)의 방대한 작업 속에도 유사한 사례들이 적지 않지만, 목욕 대신 잠(꿈)으로 이 과정을 설명할 수도 있겠다. 대작 〈수학의 원리〉(1910~1913)의 공저자 중 한 명인 러셀(B. Russell)은 연구 중 궁지에 몰릴 때마다 스스로 무의식의 활성을 (사뭇 주술적으로) 부추기면서 잠자리에 들곤 했고, 그 다음날의 작업에서는 신통할 정도로 좋은 성과를 내곤 했다고 그의 자서전 속에서 (당대 최고의 계몽주의자답지 않게) 술회하고 있다. 프리드리히(K. Friedrich)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일반적으로 갑작스럽게 오는데, 대개 크나큰 정신적 활동 다음에, 정신의 피로 상태가 신체의 휴식과 결부되는 상태에서 온다.”


조계종의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은 ‘공부는 꿈속에서까지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 노숙한 선승의 일갈은 영감의 배태에 대한 과학의 이치를 소박하게 꿰뚫고 있다. 밤은 근실한 낮에 호의적이고, 무의식은 정성을 다하는 의식에 주목하는 법이다. 잠시 이 모든 경험을 두루뭉술하게 정리해 보자면, 영감이 잉태되는 과정은 일종의 무의식적 숙성인 셈인데, 여기서 극히 흥미롭고 중요한 지점은 이 무의식이 생산적으로 활성화하려면 반드시 의식의 성실한 시행착오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네 속담도 이같은 이치의 일단을 담고 있다. 지성이 의식적 모색이라면 감천은 무의식적 응답인 셈이고, 그 사이, 곧 지성의 모색을 다한 이후에 그 노력 자체를 모른 체하는 휴식과 숙성의 시기를 일러 영감의 배태기로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격언으로 ‘달빛과 더불어 옥수수도 익는다’는 게 있다. 벼나 해바라기와 마찬가지로 태양빛으로 옥수수가 익는다는 것이 우리네의 상식일진대, ‘달빛 아래 익는 옥수수’를 떠올리는 인디언들의 상상 속에는 대체 무슨 이치가 숨어 있을까? 옥수수의 맛은 햇빛의 맛이 전부일까, 혹은 우리의 잠결 속에 스미는 그 달빛의 맛을 감추고 있을까? ‘김치는 손맛’이라고들 하고, 평생 김치를 애용하는 우리 모두는 단박 그 말의 뜻을 알아챈다. 그러나 정작 김치의 맛은 바로 그 손이 김치를 잊고 있는 동안에 숙성한다. 다시 말하면, 김치를 담근 그 손길들이 자신의 노고를 알면서 모른 체하는 사이, 김치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익명의 무의식(=김치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는 것이다.


김치를 담근 손이 김치를 잊으면서 그 김치는 익고, 내 잠의 바깥에서 키를 키우는 옥수수는 달빛을 만나 그 속깊은 맛을 키우고, 성실하게 피곤한 육체를 뚫어내면서 영감은 피어오른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도청도설(道聽塗說)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


의식을 주체로 내세웠던 서구의 과학적 인식론이 전세계의 제도 아카데미아를 석권했고, 근현대의 학문성이란 그 제도적 형식의 규제를 받는다; 또 대학의 상품화 속에서 그 규제력은 노골적으로 돈과 지위의 위세를 업고 있다. 그러나 그 형식과학적 정합성만으로는 아직 ‘공부’가 아니며 물론 그것만으로 ‘지혜’에 이르지도 못한다. 가령 서양의 철학사상사가 과학주의로 흐르게 된 것은 불과 17세기 이후의 일이며, 대학의 제도 속으로 체계적으로 편입된 것은 (메이저 사상가로서는 최초의 대학교수였던) 칸트(1724~1804) 시대 이후의 일이고, 조선의 경우에도 숙종(1661~1720년) 시기를 거치면서 지방 사림 중심의 학인 공동체가 점차 관학(官學)의 체계로 수렴되는 가운데 ‘학문-기계’들의 세상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지행병진(知行竝進)이나 ‘앎과 삶의 일치’라는 학인의 과제는 단지 윤리적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인식론에 바탕한 서양의 근현대학문사가 묻어버린 어떤 가능성의 비문(碑文)과 같다. 그것은 합리적 의식과 그 성취를 슬기롭고 근기있게 모른 체하는 모종의 생활양식이며, 그렇기에 무릇 공부란 시간의 딸(filia temporis)인 것이다.


김영민/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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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riedrich 가 누군지 정확히는 모르겠고, 네이버 인물사전 검색해보니 K.프리드리히는 Karl Friedrich Benz(자동차회사만든사람)밖에 안보인다.
종정[宗正] <불교>우리나라 불교의 최고 통할자로, 총본산의 우두머리.
범박하다 [형용사] 데면데면하여 구체적이지 못하고 범위가 넓다.
도청도설[道聽塗說] [명사]길거리에 퍼져 돌아다니는 뜬소문. 《논어》의 <양화편(陽貨篇)> 에서 나온 말이다.
근기[根氣] 참을성 있게 견뎌 내는 힘.
시간의 딸 : '진리는 시간의 딸 Veritas, filia temporis'이라는 오래된 격언에서 따온 말. 김영민씨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하시는듯 하다. 자주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