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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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5월 13일 (토) 00:02 판 (→‎pp.16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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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주 장편소설

2016년 출간
204쪽
ISBN-13: 9788954641869
ISBN-10: 8954641865

pp.69~70

 그날은 10월 말답지 않게 높은 기온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추워진 하루였다. 여느 때와 같이 우리는 퇴근하는 멤버들을 보기 위해 방송국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안나오는 건가 싶게—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출차 신호가 울릴 때마다 대형차가 빠져나갈 때마다 긴장을 하며 교복 입은 사람들이 아쉬운 듯 돌아서는 것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우리도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 이미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텅빈 사거리에서 나는 가짜 눈을 뿌리며 달려가는 차를 보았고 영화 촬영중이라는 걸 알았다. 흰 조명을 밝히며, 몇몇의 스태프를 태우고 눈을 뿌리는 그 차가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문득 내가 있어야 할 곳보다 훨씬 먼 곳에 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는 그 차를 따라 달렸다. 가만히 서 있는 만옥을 뒤로한 채 “영화다! 영화다!”라고 소리쳤다.

 무척 추워서 손끝이 굳을 정도의 날씨였다. 얼마 뒤면 진짜 눈이 내릴 터였다. 도로변엔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을 태우려는 몇 대의 택시가 있었다. 모두 실내등을 끄고 있어 죽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길가에 늘어선 아파트를 보다가 저중 어느 하나라도 내 집이길 간절하게 바라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가에선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가 푸른색과 분홍색의 실내를 창백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나는 N 그룹을 보러 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만옥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날 이후 만옥에게선 더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계의 프로였으므로, 어쩌면 나보다 내 마음의 변화를 잘 알아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나는 사랑하길 포기한 걸까. 기다림에 지쳐서? 아니다. 나는 기다림이 좋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기다림이었으므로 그것은 언제나 달콤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나는 그들을 알게 된 이후 매 순간이 기다림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문장을 쓰며 그 순간을 간신히 버티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고통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기했던 걸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통이 좋았고, 어떤 면에선 그것을 자발적으로 원한 사람이었다. 불확실한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보다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pp.90~91

 좋은 일이 있을 땐 뇌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때면 불똥에 화상이라도 입을까 겁내는 사람처럼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싶어진다. 만화 속에 나오는 사람처럼 m과 나는 두 발을 마구 굴렀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듯 힘껏 달렸다. 공원은 아주 넓고 호수는 잔잔하고 아름다워서 달리기에 무척 좋다. 우리는 양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악, 씨발, 정말.
 씨발.
 죽어도 좋다, 씨발.
 씨발!


 버스를 탄 뒤에도 우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m은 더이상은 못참겠어요, 라고 말한 뒤 친구들에게 오늘의 민규에 대한 예찬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고(아마 답장은 도착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벌써 올라온 행사 사진을 클릭하면서 말했다.


 어떡하지, 너무 귀여워서 씹어 먹고 싶다.
 속눈썹을 하나하나 핥아서 올려주고 싶다.
 입에 넣어서 뼈랑 살이 분리될 때까지 침으로 녹이고 싶다.


 그런 소리를 할 때 m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선언하듯 던져지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새삼 m도 민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주말, 늦은 저녁 버스에는 사람이 없다. 젊은 남자 하나와 젊은 여자 하나가 각각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을 뿐이다. m과 나는 맨 뒤에 앉아 버스가 가득찰 정도록 많은 말을 내뱉었다. 말에 형체가 있다면 버스가 전복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p.109

 그날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아주 잠깐의 순간이지만 진실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너를 가진다는 생각만 해도 괴로웠고 네가 누군가를 쳐다보기만 해도 괴롭다면 네가 사라지는 게 옳았다. 내가 너를 포기하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으므로 그게 최선의 답이었다.

p.138

 너는 일생을 사랑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들은 음악도 많지 않았지만 사랑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느 날 고통에 못 이긴 듯 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병이야. 그러나 내가 너의 병이 된 적은 없었다. 너의 병이 나만은 비껴갔다. 나는 이것이 두고두고 서운했다.

pp.160~162

그럼 짝사랑은. 짝사랑은 어떤데.

짝사랑은 적어도 돈 안 들이고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들이대볼 수 있고, 웃는 척하면서 팔이라도 잡아볼 수 있고, 원하면 눈도 마주칠 수 있고. 야, 너 팬들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새벽부터 방송국 앞에 줄 서는지 알아?

가까이서 보려고......?

그렇지. 정확하게 말하면,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서. 아니! 눈 안 마주쳐도 좋다. 그냥 오빠랑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어서. 야, 빠순이는 그런 애들이야. 오늘은 오빠가 담이 와서 오른쪽으로밖에 고개가 안 돌아가네? 그래서 오른쪽만 본 건데도 자기가 있는 쪽 많이 봐줬다고 일주일은 날아다니는 게 빠순이라고. 보통은 그렇게 순정적인 애들인데 개중에는

미친년들도 많지. 라며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사생. 숙소 앞이나 이런 데 죽치고 앉아서 사생활 쫓아다니는 애들도 있고. 정신이 나가서 머리카락 보내는 애들도 있고.

머리카락?

응. 자기 자른 머리카락을 택배로 보내거나.

입맛이 떨어져 포크를 놨다. 그녀가 그런 나를 타박했다.

뭘 그정도 가지고 그래? 생리대 보내는 애들도 있는데.

진짜로?

어. 자기가 썼던 걸. 미치는 거지, 정말. 어떻게 그런 생각을.

골때리네.

아주 그냥 오빠의 기억에 뿌리를 내리겠다. 아니면 오빠를 농락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겠지. 어쨌든 다 성욕이랑 관련된 거 아니겠어?

성욕이라니. 갑자기 얘기가 확 튀네.

뭐,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고. 야, 갑자기 웃기네. 성욕이 없는데 미쳤다고 생리대를 보내냐? 너 설마 멍청하게 여자는 성욕이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

원래 모든 행동의 근원에는 성욕이 있는 거야. 팬들이라고 뭐 다를 것 같냐? 너는, 니 인생에서 제일 성욕이 뻗쳤던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해?

......고등학교 일학년 때.

그거 여자들도 똑같아. 그때가 제일, 열심히 팬질할 때다? 가끔 남자애들은 여자들이 성에 수동적이길 바라. 웃긴 거지. 인간으로 안 보는 거지. 여자애들은 더 성숙하고 미적으로 까탈스러워서 그렇지, 걔들도 당연히 잘생긴 남자 보면 좋아하고 그러는 거야. 어쨌든, 너는 아직까지 여자들이 로매스만 꿈꾸고 꿈속에서나 살고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나는 할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넌 그 나이 먹고도 아직도 모르는 게 많구나. 정신 좀 차려. 걔들은 단지 너 같은 애랑 섹스 얘길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너같은 애들의 성생활을 궁금해하지 않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