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학교
이서희 저, 한겨레출판, 2016년 05월 30일
ISBN13 9788984319844
ISBN10 8984319848
책은 강력히 비추.
내용보다도 주로 문장과 구성을 보는 편인데(내용은 자기 마음이니까. 사회과학서적도 아니고.), 온통 겉멋에 찌든 문장으로 가득하다. 완전히 쓰레기라면 욕할 가치도 없겠지만, 이토록 적절한(?) 한계치의 거북함을 선사하는 에세이는 정말 처음인듯.
55~56
철학자 강신주는 <망각과 자유>라는 책에서 조삼모사의 뜻을 상대의 즐거움을 찾기 위한 거듭된 시도로 설명했다. 주인은 자신의 제안에 화를 내는 원숭이를 통해 타자성을 경험한다. 자신과 같지 않음,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당혹감은 판단중지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주인은 새로운 제안을 하고 이번에는 원숭이들의 기쁨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저자가 해석하는 조삼모사는 상대를 속이고 조롱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나서는 여정에 가깝다. 유혹의 과정도 다르지 않다. 유혹에 전제가 되어야 할 것 역시 타자성의 발견이다. 상대가 나와 다름을 깨닫는 것,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대의 욕망을 살피고 탐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즐거움과 너의 즐거움이 만나는 자리를 고민하고, 어느 순간 우리의 즐거움이 부쩍 가까워진 것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유혹의 가장 큰 보상이다. 물론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은 두렵고도 지난한 과정이 되기도 한다. 거부당할까봐 두려워 도망가기도 하고 공격적 태도로 미리 무장하기도 한다. 유혹은 이와 같은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험한 상대가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상대임을 설득하며 다가가고 또 상대를 자발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일이다. 설득은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81
둘째, 거짓말은 오직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든가 이룰 수 없는 약속 따위를 담보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미끼로 상대를 유혹하는 일은 그들의 자부심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그들을 진실함의 경지에 올려놓기까지 한다. 바람둥이에게 성취란 주어진 패를 잘 활용하여 얻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 고통은 유혹의 실패를 의미한다. 연애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자는 사랑의 환상을 자극하고 관계에 오지 않을 미래를 투영하여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일 때가 더 많다.
88
얼마 전 30대 초반 청년에게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데 따르는 부담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남자가 써야 하는 시간과 비용은 그들이 감당하기에 부담스러운 수준일 때가 많다고 했다. 그것을 당연히 요구하는 여성에 대한 불만도 들었다. 그의 20대 시절, 많은 또래 남성은 여자를 만나 밥을 사고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유혹이 진행된다고 믿었다 했다. 여자에게 그것은 단순히 시간보내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허탈감은 때로 분노가 되기도 했다. (하략)
90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만들고 가꾸고 넓혀나간다. 유혹은 그 세계가 만나고 연대하고 때로는 중첩되고 확장되는 경험이다. 연애의 경험이 벅찬 이유는 천지가 개벽하고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을 온 존재로 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밀실을 전제로 한 유혹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이를 뿐이다. 더는 갈 곳이 없어진 뒤 남은 일은 서로를 갉아먹고 파괴하고 소진하는 거다. 그러므로 유혹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편이 좋다. 광장은 멋진 데이트 장소다.
117
알리오올리오의 마늘 양은 엄청났다. 마늘을 집어먹으며 내가 말했다.
“어쩐지 이걸 다 먹으면 몸이 매우 좋아질 것 같은데.”
“적어도 오늘 저녁만큼은 암에 걸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죠.”
“맵기는 맵네요.”
“그러게요. 오늘 저녁에는 절대 누구랑도 입 맞추지 마세요.”
“그래서 일부러 시킨 거예요.”
124~125
사람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가치는 비슷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공유하는가의 문제였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나게 같은 부류로 보였던 사람들이 더 거슬리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자세의 문제였다. 드러나는 매력은 금세 사라진다. 한두 차례 데이트를 해보면 알게 된다. 드러나는 가치관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호감을 느끼고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곧바로 삶의 자세의 문제로 넘어갔다. 결론을 말하면, 차라리 세계를 바라보는 데 모호한 입장을 견지해도 자기성찰 능력이 빼어난 사람이 더 편안했다. 그들은 대화와 설득이 가능했다. 상대를 존중하는 버릇이 몸에 밴 사람,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이 일상이 된 사람만큼 안정을 주는 이는 없었다. 가까워짐을 이유로 나를 압도하려 하지 않고 존중과 관심, 예의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삶의 오랜 습관이자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감수성의 영역이다. 배려와 자기성찰의 감수성이 몸에 밴 사람은 유연하다. 함께 대화하고 더불어 변화하는 과정이 편안하다. 함부로 지배하려 하지 않는 자세는 나 역시 마음 깊이 상대를 존중하게 한다. 무작정 가르치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묻고 상대를 알고자 노력하는 것. 동시에 자신을 꾸밈없이, 그러나 부담없이 드러내는 일. 일상을 나누는 사람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293~294
매혹은 때로 두려움을 부르고 두려움은 말을 잃게 한다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말을 하지 않은 자는 사랑을 잃게 되는 법이었다. 어쩌면 시작조차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