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한 인생
(책의 가장 처음)
아주 오래 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 옆구리에는 책과 노트를 끼고 있었다. 속눈썹이 긴 그녀의 눈은 꿈꾸듯 먼 허공을 보았고 입술은 장미꽃잎처럼 윤기가 흘렀다. 상아로 깎은 듯한 턱이 살짝 위로 들려서 목선을 한층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말을 할 때마다 그 위로 검은 단발머리가 조금씩 출렁거렸다. 류의 아버지는 그 눈빛과 뺨과 입술의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상대의 말을 들을 때 그녀는 밤색 구두의 앞부리를 들고 굽으로 바닥을 가볍게 톡톡 쳤다. 숙인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뒷목의 작고 둥근 뼈가 드러낫다. 갑자기 그녀의 동작이 멈췄다.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고, 그런 다음 조용히 웃음을 지었을 때, 그리고 그녀의 얼굴 가득 그 웃음이 퍼져나가면서 마치 봄 햇살이 비쳐든 듯 갑자기 전화부스 안이 환해졌을 때, 엄청난 볼티지의 전율이 류의 아버지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녀로부터 흘러나온 그 강력한 빛은 순식간에 류의 아버지가 서 있는 곳까지 뻗어나와서 그의 두 발목을 꽉 붙잡았다.
그곳은 대학교 앞의 버스정류장이었다. 류의 아버지는 물론 자기의 집 방향과 상관 없이 그녀가 타는 버스에 뒤따라 탔다. 그날이 류의 부모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졸업반인 어머니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라면 어머니에게 애인이 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 순정파였다. 그것은 오히려 류의 아버지가 사로잡힌 맹렬한 불꽃에 산소가 포화된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버지의 갈망은 산불처럼 타올랐다. 즉각 자신의 모든 낭만적 기질과 무분별한 행동력을 총동원한 끈질긴 구애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뒤따라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교생이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술 취한 사람처럼 웃고 비틀거렸다. 몽유병처럼 홀려 있었고 장님처럼 맹목이었다.
(중간쯤)
가난한 유학생이 외국인의 입주 가정부가 되어서 창밖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떤 여름 오후. 스러지는 햇빛 아래 나무의 긴 그림자가 마치 자신의 인생의 퇴락처럼 힘겹게 빛과 모양을 유지하려 애쓰며 바래가던 날, 어머니는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상실의 세계를 보아버렸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틀을 지켜야 하고 더상 동의하지 않게 된 이데올로기에 묵묵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세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책의 가장 마지막 파트. <류의 노래>거의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