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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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5월 12일 (금) 23: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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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가장 처음)

 아주 오래 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 옆구리에는 책과 노트를 끼고 있었다. 속눈썹이 긴 그녀의 눈은 꿈꾸듯 먼 허공을 보았고 입술은 장미꽃잎처럼 윤기가 흘렀다. 상아로 깎은 듯한 턱이 살짝 위로 들려서 목선을 한층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말을 할 때마다 그 위로 검은 단발머리가 조금씩 출렁거렸다. 류의 아버지는 그 눈빛과 뺨과 입술의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상대의 말을 들을 때 그녀는 밤색 구두의 앞부리를 들고 굽으로 바닥을 가볍게 톡톡 쳤다. 숙인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뒷목의 작고 둥근 뼈가 드러낫다. 갑자기 그녀의 동작이 멈췄다.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고, 그런 다음 조용히 웃음을 지었을 때, 그리고 그녀의 얼굴 가득 그 웃음이 퍼져나가면서 마치 봄 햇살이 비쳐든 듯 갑자기 전화부스 안이 환해졌을 때, 엄청난 볼티지의 전율이 류의 아버지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녀로부터 흘러나온 그 강력한 빛은 순식간에 류의 아버지가 서 있는 곳까지 뻗어나와서 그의 두 발목을 꽉 붙잡았다.  

 그곳은 대학교 앞의 버스정류장이었다. 류의 아버지는 물론 자기의 집 방향과 상관 없이 그녀가 타는 버스에 뒤따라 탔다. 그날이 류의 부모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졸업반인 어머니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라면 어머니에게 애인이 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 순정파였다. 그것은 오히려 류의 아버지가 사로잡힌 맹렬한 불꽃에 산소가 포화된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버지의 갈망은 산불처럼 타올랐다. 즉각 자신의 모든 낭만적 기질과 무분별한 행동력을 총동원한 끈질긴 구애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뒤따라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교생이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술 취한 사람처럼 웃고 비틀거렸다. 몽유병처럼 홀려 있었고 장님처럼 맹목이었다.

(중간쯤)

가난한 유학생이 외국인의 입주 가정부가 되어서 창밖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떤 여름 오후. 스러지는 햇빛 아래 나무의 긴 그림자가 마치 자신의 인생의 퇴락처럼 힘겹게 빛과 모양을 유지하려 애쓰며 바래가던 날, 어머니는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상실의 세계를 보아버렸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틀을 지켜야 하고 더상 동의하지 않게 된 이데올로기에 묵묵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세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책의 가장 마지막 파트. <류의 노래>中)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눈빛과 입술과 상기된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로 웃음이 퍼져나갔을 때 봄 햇살이 비쳐든 듯 전화부스 안이 환해지면서 엄청난 볼티지의 전율이 아버지의 심장을 강타했다. 류의 아버지는 즉시 사랑에 빠졌다. 몽유병자처럼 비틀거리며 장님처럼 맹목으로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로 하여금 그 부스에서 통화하던 남자를 버리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류의 어머니는 애인을 배신하고 류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류는 어머니의 이혼과 재혼 모두 고독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녀다운 이지적인 독립심으로 고독의 침전물 속에서 자유로움과 평화를 찾아냈고 그 범주 안에서 인생을 꾸려나가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복수심 때문도 아니었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이미 품위있고 차가운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아버지와 분리시켜왔다. 복수라면 아버지를 고독하게 만든 것으로 충분했다. 아버지를 향한 복수는 아니었다. 자신을 고독으로 이끈 매혹의 세계에 복수한 것이었다 류의 아버지가 사랑에 빠진 것은 다른 남자와 통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어머니에게로 이끌었던 매혹은 처음부터 배신 속에서 잉태되었다. 어머니는 그 매혹을 고독으로 환산함으로써 운명에게 갚아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될 때처럼 불현듯 끝났다.  어느 휴일 오후 어머니가 뒷마당 덱의 피크닉 테이블에서 홍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을 때 먼지를 뒤집어쓴 아버지의 낡은 지프가 모습을 나타냈다. 차에서 내린 아버지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어 보인 다음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두시간쯤 뒤 책을 덮고 찻잔을 챙겨 일어나던 어머니는 피크닉 테이블 앞에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뭔가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지난 주말 자신이 깎아놓은 잔디와 그 사이사이 돋아난 노란 민들레에 무심한 눈길을 던졌고 한참 뒤에야 보름 동안 소식을 몰랐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기억해냈다. 어머니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햇살은 부드럽고 대기는 맑았으며 꽃향기 섞인 미풍이 불어오는 멋진 날씨였다. 옆집의 노부부는 이층 발코니에 의자를 내놓고 썬글라스를 쓰고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꼬리 긴 다람쥐 한마리가 천칭 모양의 새 모이통에 매달려 그네를 타듯 흔들흔들 씨앗을 훔쳐 먹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눈을 들어 담장 아래 잎이 무성한 삼나무 세 그루를 바라보았다. 이사 온 첫날 어린 류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운 류의 아버지가 그 나무 사이사이로 곡선을 그으며 페달을 밟는 모습이 스쳐갔다. 짧은 머리를 나풀대며 그때와 똑같은 동선으로 혼자 자전거를 타던 소녀 류의 모습도 보였다. 어머니는 또 마른 흙으로 덮인 작은 화단을 보았다. 아버지가 비료를 여덟 부대나 사온 뒤 이틀 동안 삽으로 갈아엎어 밭으로 만들고 채소 모종을 잔뜩 심었지만 물을 주지 않아 모조리 말라 죽은 뒤 아무것도 심지 않게 된 화단이었다. 어머니는 정원 장화를 신고 화단 한가운데 호스를 들고 서 있던 어린 류의 젖은 머리카락과 울먹이는 얼굴을 보았다. 어느 황금연휴 내내 아버지는 뒷마당에서 스케치 도면과 목공기구들에 둘러싸여 어린이용 책상을 만들었다. 류의 열세번째 생일선물이 될 줄 알았던 그 책상은 연필로 눈금이 표시된 몇개의 이어진 판자의 상태로 차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어머니는 또 류와 어머니가 배드민턴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버렸을 때 덱에서 고기를 굽던 아버지가 달려가서 뛰어넘었던 쥐똥나무 담장을 보았다. 그사이 고기는 다 타버렸고 저녁으로 햄버거를 사러 갔던 아버지는 취해 돌아왔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보았다. 햇볕 좋은 날 헤드폰을 낀 채 해먹 위에서 모로 누워 잠들어 있던 아버지의 달큰한 숨소리와 배 위에서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던 얇은 린넨 담요, 그리고 땀이 찬 헤드폰을 빼거나 햇빛에 달궈진 담요를 걷으면 그 즉시 눈을 뜨던 아버지의 화난 얼굴. 살아오는 동안 그런 낯선 얼굴과 부닥친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머니는 그 시간 너머를 보기 시작했다. 그 나라로 떠나오기 전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캠퍼스와 거리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아버지 팔의 힘, 너털웃음, 벚꽃잎이 날리던 밤의 고궁,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새어나오던 불빛, 비 오는 밤 술집 탁자 아래에서 잡았던 차고 축축한 손바닥, 아버지가 쓴 편지 겉봉의 큼지막한 글씨, 빛바랜 티셔츠에서 나던 빨랫비누 냄새와 푸른 잉크가 묻어 있곤 했던 팔꿈치, 그리고 아버지의 노랫소리와 숨 가쁜 맹세들을 보았다. 마치 천문학자들이 어느 별에선가 시작되어 우주를 통과하는 동안 그 거리만큼의 과걸르 갖게 된 빛을 바라보듯이, 그 빛이 담고 있는 천체와 그보다 더 먼 과거로 존재하는 별의 시간을 보듯이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더이상 아무런 회한도 그리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까지를 보았던 것이다. 자신은 사라져버린 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완결된 것이며 완결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죽은 것이다.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고독 역시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살아 있을 뿐이었다. 이유를 깨달았다거나 시간에 지쳤다거나 하는 명분은 어리석고 공허했다. 어떤 일이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종결되는 것이며 때가 되었다는 말은 그때를 알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중략)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류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