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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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8월 2일 (수) 17:2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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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형.

번개 친 거 봤냐, 새벽에.

봤냐고.
못 봤다.
못 보고 뭐했어.

잤냐.
잤다.
에이, 자지 말고 보지.

형, 오늘 개 봤어?
……왜.
봤냐고.
봤다.
보지 말고 자지.
뭐?
보지 말고 자지.
자지 말고 보지, 보지 말고 자지, 자지, 자지 말고 보지, 보지, 하고 앨리시어의 동생은 웃는다. 앨리시어가 내던진 베개에 얼굴을 맞고도 멈추지 않는다. 기침을 하고 더 웃고 숨을 고르느라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가 말한다.
형.

형.

자냐 형.
자냐고, 씨발.
씨발이라고 하지 마라.
왜.

형.

불 켤까?
자라.
잠이 안 오는데.
자라고.
안 오는데 어떻게 자냐 잠을.
어쩌라고.
나 얘기 하나만.

듣다가 자게 하나만.

형.

형.
아 씨발.
씨발 하지 말라면서 자긴 씨발거리냐.
하나만 한다.
어.
들어라.
어.
제대로 들어.
어.
애새끼가 있었다. 애새끼는 자기 어머니가 여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얼굴이 이상해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새끼가 보기에 밤에 불을 끄고 나면 특별히 더 이상했다. 어둠 속에서 코라거나 입의 윤곽이 아무래도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주둥이라서, 눈도 길어 보이고, 귀도 길어 보이고, 아무래도 여우라서, 밤에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러면서 어머니를 보면 어둠 속에서 그녀도 애새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애새끼는 용기를 낸 거야. 만져보려고 팔을 뻗어본 거야. 기다란 주둥이에 손을 대본 거야. 그러자 구흣, 하고 어머니가 웃었다.
굿?
여우는 그렇게 웃는 거야.
여우였나!
진정한 여우였던 거지. 여우가 애새끼 손을 잡으면서 굿, 하고 웃었다. 들켰나, 여우라는 것을 들켰나,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여우다, 오래전부터 뼛속 깊이 여우다, 애새끼 손을 잡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말이야, 나처럼 뼛속 깊이 여우인 여우들이 인간인 척 마을을 꾸리고 사는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에 네 아버지가… 한 청년이… 목욕봉사를 하러 마을로 들어왔던 거야, 하고.
목욕봉사?
사람들을 목욕시켜주는 일 말이야 새끼야.
어.
어디까지 했냐. 청년이, 그 청년이, 뭐라 그랬겠냐. 솔이며 비누가 담긴 자루를 메고 그 마을에 들어선 청년이 뭐라고 그랬겠냐고. 왔나이다, 하지 않았겠냐.
왔나이다, 가 뭐야.
옛날이니까.
옛날엔 그렇게 말했어?
옛날이니까. 왔나이다, 왔나이다, 목욕봉사 왔나이다, 하고 등장하니까, 자기들의 마을을 꽉 닫아두었다고 믿었던 여우들로서는 허를 찔렸다고나 할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 않았겠냐. 여우들이 어땠겠냐, 뭐라 그랬겠냐, 먹어버리자, 먹어서 치워버리자, 그러지 않았겠냐. 하지만 여우들은 그 청년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는 것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여우라는 것이 또 호기심이 대단해가지고, 모처럼 마을에 들어온 인간이 목욕을 도와주러 다닌다는데, 그렇다면 목욕을 받아볼까, 하고 여기저기서 드러누워버렸던 거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하고 애새끼가 묻자, 네 아버지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성실하게 목욕을 도왔단다. 하루만으로는 끝나지 않아서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닷새 엿새, 그렇게 보름 동안이나 목욕을 도왔단다, 하고 여우가 말했다. 여우는 처음부터 그를 따라다니며 전부 지켜보았다는 거였다. 여우는 뭐랄까, 마을 여우들과는 뭔가 다른 그 청년이 좋았다는 거야. 그래서 여우는 청년이 마을을 떠나던 날에 몰래 따라나섰다는 거야.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청년의 앞으로 나서서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반했나이다.
옛날이니까.
옛날엔 뭐든 그렇게 말했을 거니까, 반했나이다, 반하고 말았나이다. 그걸 듣고 청년은 어땠겠냐, 곤란했겠지, 뭐래, 이러면서, 곤란했겠지. 하지만 본색이 여우고 진정 예뻤으니까, 여우를 결국 집으로 데려갔고, 그뒤로 새끼를 낳은 거지.


그래서?
뭐?
새끼를 낳고, 그래서?
그래서… 새끼를 먹이는 거지.
새끼가 뭘 먹는데?
고기 먹겠지.
나도 고기.
고기도 먹고 과자도 먹고 사탕도 먹고 엄청나게 먹어대니까 가난하지 않았겠냐.
그럼 가난해?
고기랑 과자랑 엄청 비싸니까. 청년의 인간적인 부모형제누이들이 그걸 보고 뭐라고 했겠냐. 진정 인간적으로 보란듯 가르쳐놨더니 그 많은 암컷 가운데 돈이고 뭐고 없는 여우를 데려왔다, 이러고 지랄하지 않았겠냐. 여우로서 맨몸으로 시집을 온 처지에 염치도 없이 덜컥, 고래 같은 새끼를 낳아서, 그 두개의 입을 한번에 먹이느라고 자신들의 형제가 얼마나 고되겠느냐고 틈만 나면 여우를 잡으려 들지 않았겠냐. 서방 잡을 년, 씨발 년, 썅년, 여우 같은 아니 진정한 여우 년, 세수할 때 비누 세 번 비빈다고 씨발 년, 국 끓일 때 소금 넣는다고 썅년.
그건, 그건 그 얘기다.
뭐.
우리 뒷집 아줌마, 그 집 얘기다.
아니다.
그 집 얘긴데. 그 집 할머니가 그 집 아줌마한테 맨날 그랬는데.
하지 말까.
아니야.
안 해 새끼야.
아니야 그래서?

형 그래서.
그래서 썅…년…씨…발…년…하도 그런 말을 들으니까 여우가 어땠겠냐. 와 내가 정말 씨발 년인가, 나는 진정 썅년인가, 서방을 잡을 년인가, 생각하지 않았겠냐.
어.
그래서 서방이 죽고 말았을 때.
뭣, 그 아저씨도 죽냐.
죽고 말았을 때, 여우는 생각하지 않았겠냐. 서방의 부모형제누이들이 말하는 대로 내가 먹었나, 나도 모르는 틈에 서방을 내가 잡아먹었나. 공허하도다, 하고 여우는 울지 않았겠냐. 울고 울고 울어서 여우의 얼굴이 되었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하니까, 서방의 형제들은 조문객들에게 여우를 보이지 않으려고 방에 가두었던 거야. 여우가 날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방에 가둬두고 서방의 시신도 보여주지 않았던 거야. 마지막 가는 길이니 보여달라고 애원을 해도 보여주지 않아서, 그녀는 장례가 진행되는 내내 그 방에서 공허하도다, 울다가 마침내 마음먹었다. 먹어주마, 먹지 않아도 먹었다, 먹어도 먹었다, 라는 소리를 들을 바엔 내 차라리 너희를 먹어주마. 여우는 기다렸다. 장례식이 끝나고, 인간들이 자신을 가둬두었던 방의 문을 여는 때를 기다렸던 거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여우는 진정한 여우가 되어서, 씨발, 이러면서, 인간을 덮쳤던 거다. 씨발 썅년의 맛을 보여줄까, 씨발의 맛을 보여줄까, 씨발, 내가 씨발, 나는 씨발, 이러면서 온 집안을 완전 씨발상태로 만들어버리고 씨발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
어어.
잘 들었냐.
어.
알겠냐 너.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들으면 씨발, 이 된다는 거.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말해도 씨발 된다 너.
왜?
말하면서 자기 말 듣게 되잖아, 씨발 씨발, 하고.
오.

형 그럼 뒷집 아줌마는 여우가 된 건가? 이제 여우라서 안보이는 건가?
몰라 새끼야.


형.

형은 나더러 새끼라고 그러잖아.
새끼니까.
새끼냐.
새끼지 니가 그럼 아빠냐.
그럼 형도 새끼다. 나도 형더러 새끼라고 할 거다. 형 새끼, 새끼 형.
이 새끼가.


형.

그래서 여우는 어떻게 되냐.
그래서… 그리고… 새끼는 자라고 너는 자는 거지.

자라.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