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6 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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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먼저 보았으나 대략 실망했음. 너무 훌륭한 재료들을 굉장히 조잡하게 섞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개인적으로 어린 여배우를 저렇게 이용해먹고서 저정도밖에 결과물을 못뽑아냈나 하는 고리타분한 영화 외적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했음. 은교와 서지우가 관계를 하게 되는 개연성이 너무 약했음 (은교라는 인물이 가지는 입체성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 내생각에 이 영화의 최대약점이 은교를 너무 상황에 맞추어서 이런 사람 만들었다 저런 사람 만들었다 하는 일관성의 결여. 이야기의 전개상 주된 필연의 고리를 너무 많이 망가트림).
- 손석희의 시선집중 4월 21일 방송 '토요일에 만난 사람'코너에 박범신씨가 나오셨는데, 썩 인상깊지는 않았고, 뭔가 불길했음. 뭐가 불길했냐면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었던 참(이미 책상에 책이 대기중)이었는데 작가의 인터뷰를 듣고 작가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음.
- 책 맨 끝에보면 작가도 밤에 썼으므로 독자도 밤에 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책 맨 끝에 있는 바람에(ㅋㅋㅋ) 느지막한 오전에 읽기 시작해 자정 전 이른밤에 모두 읽음. 어디선가 박범신씨가 영화를 보시고서 '책보다 영화가 나은면이 있다'고 하신 적이 있으시던데, 동감. 영화를 본 직후에는 나름 책에 대한 기대감에 시나리오 작가가 바보인가 생각도 했지만 책까지 읽고 난 뒤에는 차라리 시나리오 작가가 더 낫다 싶었음. 같은 내용이라도 영화가 더 잘 살린 부분이 있음(예를 들어 서지우의 사인(死因)이 이적요의 예상과는 달랐던 그 부분. 정지우 감독 역시 명불허전)
- 책의 중간중간 이미 발표된 박범신씨의 시가 실려있는데 아무래도 시인으로써는. 음... (예를들어 책에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문장이 계속 되다가 어떤 지점에서 문장의 중간부분이 한 행으로 이루어진 문단으로 분리되어 그부분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 끊는 지점, 호흡)
- 박범신씨 자신은 이적요보다는 서지우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 생각을 했음.
- 책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부분은 다음부분,
너는 의젓한 어미 닭같이 동생들을 품고 있었다. 내 가슴이 한순간 요동쳤다. 너의 피가 양쪽으로 공평하게 흘러나가 네 동생들의 피와 뜨겁게 섞이는 것을 보았고, 동생들의 숨결이 껴안은 네 팔을 타고 흘러가 너의 가슴, 고동치는 숨결에 짙푸르게 고여드는 것도 나는 보았다. 그것은 일찍이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이었다. 너는, 너희는 살아 있었고, 함께 있었다. 해는 더욱 찬란해졌다. 나는 비로소 그동안 네가 가진 아름다움의 절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중략) 이삿짐에 끼여 두 동생을 안고 있는 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세상의 살아 있는 길로, 나아가는, 트럭 위의 너와 네 동생들이 얼마나 근사했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두 동생을 양팔로 싸안고 있는 너의 모습은 햇빛보다 환했다. 일상적 삶에 깃든 너의 참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기가 또 에러. '은교'가 정말로 작가가 말하듯 '갈망의 3부작'에 속한 작품이라면 이런부분은 없느니만 못하다. - 에필로그 파트는 통째로 떼어내고 싶은 심정.
- 재미는 드럽게 없지만 고전은 왜 고전이며, 재미는 있고 잘 읽히지만 베스트셀러는 왜 베스트셀러인가를 다시한번 깨닫게 된 기회. 오래전 김진명의 '아버지'를 읽었을 때가 생각남. 그 썩 좋지 않았던 기분.(하지만 절대로! '아버지'급의 정크는 아니다)
- 이렇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으므로 결론은, 이 책은 (나에게) 훌륭하고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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