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30 공부론(4) - 차붐, 적지(敵地)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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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이런저런 학술모임에 초청받아 강의나 강연을 한 것이 줄잡아 수백 건은 되겠다. 1990년대에는 이른바 ‘심층근대화’를 위한 인문학 운동 차원에서 열심을 부리기도 했던 것인데, 막 개화되고 있던 대중들의 문화적 활성을 인문학적 가치와 연계시키려고 애를 썼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학인들과의 대화적 만남과 그 창의적 긴장 속에서 내 공부를 점검할 수 있는 ‘현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 숱한 강연들의 풍경, 그 명암과 득실을 일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강연들을 돌이켜볼 때 가장 의미심장하게 남은 인상으로는 아무래도 ‘오인과 어긋남’일 것이다. 한마디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강연장은 늘 오해의 잔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리처드 로티나 헤럴드 블룸 등이 말하는 오인의 역설적 창의성도 있었을 테고, 자크 라캉의 말처럼 대화적 관계 그 자체의 조직 속에 각인된 어쩔 수 없는 오인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강연장에서 횡행하는 의사소통적 오해는 이런 식으로 변명할 수 없는 병통들로 들끓었고, 그것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우선 세태를 그 배경으로 거론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2000년을 고비로 청중들의 관심이나 열의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과 인문학의 텍스트는 사용설명서나 리모컨만 달랑 달고 나오는 제품이 아니다; 좋은 글과 말일수록 한 쪽 한 쪽, 한 문장 한 문장, 한 자 한 자씩을 자못 고통스럽게 읽고 듣고 이해하는 ‘비용’은 필수적이지만, 세태와 대중은 이런 식의 비용에 날이 갈수록 적대적이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을 위한 얼토당토않은 화폐의 비용은 앞다투어 치르면서도 좋은 책의 해득을 위한 정신의 비용은 좀처럼 치르려 하지 않는다. 학문 일반의 기능주의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상업주의적 키치화, 그리고 퀴즈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이며, 이는 강연장의 기운과 분위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웃기기라도 못하면 주목을 받기 어려운 세속 속에서, 진지한 공부는 점점 자신의 영토로부터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강연 그 자체가 한갓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진지한 교학상장의 배움터가 되기는커녕 기성의 제도를 유지하려는 반복강박적 장치가 된 채, 서둘러 질문과 토의를 닫아 버리고 뒤풀이랍시고 술담배 속에 갖은 잡담이나 일삼는 게 예사였다. 더 이상의 얘기는 오직 각설, 각설, 하겠다.


내가 특별히 주목하려는 것은 학술행사나 강연에 참가하는 학인/지식인들의 행태다. 그리고 그 요점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문사들은 유독 학술적 대화에 만연한 오해와 오인 속에 덤으로 묻힌 채 스스로의 무능과 나태를 손쉽게 숨길 뿐 아니라, 아예 왜장치듯 실없이 떠벌리기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화술에 대한 몽테뉴의 고전적 권면과는 달리, 강연자를 위협하는 정신의 힘을 만나는 쾌락(!)은 점점 드물어만 간다. 인문학적 대화는 그 속성상 꼼꼼한 준비와 섬세한 접근, 죽도록 경청하기와 아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그리고 동정적인 혜안과 합리적인 대화술이 필수적이기에 일회성의 극장식 만남에 따르는 한계는 만만치 않다. 우선 강연의 형식 자체가 비인문학적이기도 하려니와 강사를 대하는 문사-청자들의 태도에서 그런 실천적 지혜와 배려, 혹은 근기를 찾아보기는 차마 어렵다. 발표할 문건을 미리 숙독하고 참가하는 이들조차 소수인데다, 그저 제 시간에 자리를 지켜주는 이들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본 최고의 무사였던 미야모토 무사시가 그의 병법서에서 ‘차림새가 없는 듯이 차림새가 있는’ 이치를 거듭 강조한 것은 무사의 삶이란 곧 일생일대사의 승부의 현장이고, 상대를 놓치는 순간 곧 죽음은 임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없이 많은 학술행사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자탄하는 것은 우리 문사들의 세계에서는 상대를 극진히 공대해야만 살아남는 긴박하고 위태로운 만남의 현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뿌리면서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한다.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냉혹한 무사들/스포츠인들의 세계와 달리, 문사들은 ‘(나쁜) 모방적 상호성의 메커니즘’(르네 지라르) 속에서 오해의 잔치와 실수의 파티를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물론 칼과 펜의 이치 사이에 놓인 어떤 심연을 까탈스럽게 모른 체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말(어휘)로 행복해지는 세상’(리처드 로티)은커녕 각자의 실력조차 제대로 점검할 수 없는 문사들의 제도화된 학술행사와 그 곤경을 더불어 성찰하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먼 이국에서 낭보를 띄워주곤 했던 갈색폭격기 차범근의 활약을 기억한다. 적지(敵地)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뛰고 피하고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이룬 그 정직한 성취를 기억한다. 말없이 정직하던 그의 근육을 기억한다. 적들을 기민하게 공대해야만 살아남는 승부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공대하던 그의 정직한 몸을 기억한다. 오직 실력만이 통하던 그 현장의 열기를 여태 생생히 기억한다.


김영민/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