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30 공부론(3) - 변덕이냐 변화냐
영리한 인간은 그 근본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가 조형해온 ‘현명한 인간’이란 이미,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공부의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이다. 사과나무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충실히 사과를 맺으며 그 시절인연을 소중히 하는 법이고, 가령 일단 소크라테스를 만난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이’ 그의 자장(磁場)에 휩쓸려 들 수밖에 없다. 나는 20대의 어느 순간 키르케고르를 ‘만나’※나는 그를 ‘읽지’ 않았다!※기성의 제도 기독교로부터 섭동(攝動)했는데, 아, 실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이에 비하면 영리한 것은 ‘변화’가 아니거나 혹은 기껏 ‘변덕’이다. 아, 우리의 세속은 바잡거나 반지빠른 변덕의 세상이다! 물론 변덕은 몸이 아니라 생각이 주체일 경우에 가능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변화의 비용이고 그것이 결국은 몸의 주체적 응답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면, 공부란 삶의 양식을 통한 충실성 속에 응결한 슬기와 근기일 수밖에 없다.
영리한 인간들은 학같이 긴 다리로 물가를 노닐면서 솜씨있게, 날름날름 물고기들을 쪼아먹는다. 학은 자신의 깃을 물에 적시지 않는다. 칸트를 비판하는 헤겔의 유명한 말을 임의로 차용하자면,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영법(泳法)을 배우는 사람은 참으로 영리한 인간인 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세속인 자본제적 삶의 형식은 이처럼 영리한 인간들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한다. ‘대학(大學)’이라는 자못 무서운 이름을 붙인 곳마저 그 영리한 인간들이 자신의 영토로 점유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두커니 서거나 이드거니 걸으면서 현명한 인간, 혹은 공부하(려)는 인간은 물속에 몸을 잠근다. 그리고 너무 오래, 너무 깊이 잠근 탓으로 혹간 몸에는 지느러미가 돋고 아가미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생활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단절하며, 마침내 ‘변덕’이 범접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화’하고 마는 것이다.
영리한 인간들은 공부조차 상품으로 대하며, 값없이 냉소하는 가운데 그 필요한 부분을 발밭게 뽑아 먹는다. 그래서 공부를 ‘퀴즈화’시켜 벼락치기를 일삼는다. 임금의 호의도 무시한 채 스스로 과거시험을 피해 다니곤 했던 연암도 학술-문장-과거로 서열을 매긴 바 있고, 다산도 과거제의 폐해가 없는 일본을 한편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과거를 아예 공부로 치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의 안팎을 막론하고 온통 현대판 과거시험들로 북새통이다. 이 수험생들은 자신의 몸으로써 공부와 만나지 않는다. 자신의 생활양식으로써 공부를 뚫어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만날 때라야 배운다(It is when we meet someone that we learn something)’(서양 속담)지만, 이들에게는 ‘만남’ 그 자체가 송두리째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우(A. Badiou)의 말처럼, 만남이 아니기에 아무런 ‘사건’일 수도 없는 것! 이들은 선생도 만나지 않고 구경하며, 책도 만나지 않고 절취(截取)할 뿐이다.
공부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내가 공부를 지배하려 할 때 변덕은 변덕스럽게 기승을 부린다. (내 용어로 풀면, 앞의 것은 ‘하아얀 의욕’이고 뒷놈은 ‘박잡한 욕심’일 뿐이다.) 물론 그 변덕이 상업주의적 차이의 문화와 결탁하고 ‘결코 물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상품의 전략’(아도르노) 속으로 되먹임된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공부가 나를 지배하는 사건을 일러 변덕이 아닌 ‘변화’라고 부른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만난 사건, 조영래가 전태일을 만난 사건, 그리고 뉴턴이 사과를 만난 그 사건 속의 ‘돌이킬 수 없음’처럼, 그 만남 속에 개시된 공부의 물줄기는 돌이킬 수 없이 그 학생들을 휘어잡는다.
얼마 전, 사진가 정주하 교수의 소개로 전직 불교 승려였던 바라춤과 차(茶)의 명인을 만나게 되었다. 전주 인근의 외진 곳에 한옥을 개축한 집은 상당한 규모의 정원을 보듬고 있었는데, 갖은 꽃나무들이 시절을 좇아 왕성했고, 한가운데의 조촐한 연못도 주인의 기색을 닮은 듯 소담스러웠다. 2천만원의 전셋집이라는데 서울이라면 그 100배를 준다 해도 얻기 어려운 운치와 깊이가 자못 그윽했다. 두어 시간 가량 차를 대접받으면서 환담하는 사이, 그 주인 부부가 ‘녹차방’으로 쓴다는 작은 문간방을 구경하면서 나는 또 한번 그 ‘돌이킬 수 없음’의 기미에 젖는 작은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현란하고 번드레한 만화경적 도시의 공간과는 다른 공간, 돌이킬 수 없이 그 ‘깊이’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공간, 도시적 영리함만으로는 도무지 지배할 수 없는 공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인문(人紋)이 아로새겨진 공간, 인간 존재의 다른 차원을 불현듯 일깨우는 공간, 그리고 변덕이 없을 공간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방안을 조심스레 바장였다. 그리고 ‘욕심 없는 의욕’을 키우며 내 몸을 그 공간 깊숙이 풀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영리한 변덕으로 일관하는 이 시대를 돌아보며 ‘어떤 공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김영민/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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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만나기'를 꾀하는 것은 시험에 떨어지는 지름길이다.
심지어는 고시서점엔 그렇게 공부했다가는 망한다는 책도 몇권 있다.
하지만 공부와 만난 사람이 시험에 떨어질 리도 만무하고,
원래 시험은 한명의 '변화한 인간'을 뽑아내기 위해 아흔아홉의 '영리한 인간'을 묵과하는거다.
경험적으로, 한명의 변화한 인간은 '선택됨'으로 나타난다.
변화하고 싶다고 되는게 아니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