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6 일베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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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원익 (지은이)오월의봄2013-10-30

8

그리고 무엇보디 정당이 구축해놓은 도덕적인 프레임이 유권자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이상 단순히 진실을 알리는 것만으로 보수정치에 대할 수 없다. 이를테면 사회보장 정책이 가족을 해체시키고 나태함을 만연하게 하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뒤흔든다는 프레임이 사람들에게 한 번 확립되고 나면, 사회의 불안정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대기업과 자본의 냉혹한 탐욕이라는 진상을 아무리 알려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조지 레이코프는 이러한 보수적인 프레임 자체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책 제목이 시사하듯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이야기해도 결국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보수파의 프레임을 공격하는 것이 역으로 그 프레임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데 복무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정치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도덕적 프레임을 구축하는 게 관건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11~13

젊은 우익들의 집단행동
우선 일베 유저들은 과거의 인터넷 커뮤니티들과 달리 길거리에 나서거나 시위를 통해 자신의 주장과 존재의의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그보다 더 은밀하고 교활하게 이루어진다. 그들은 2002년과 2008년 때처럼 시위용 플래카드를 들고서 길거리 인증샷을 찍는 대신 정치인들과 시위대를 희화화하는 짤방과 콘텐츠를 생산해낸다. 거기서 촛불시위대는 촛불좀비로, 전라도는 홍어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김치녀로 희화화된다. 그들은 기성 정치권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논증을 펼치기보다는 과거의 행적과 발언에서 논리적인 모순점들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그들을 ‘저격’한다. 보수정권의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이 논란이 되면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집권 시절 강경 진압 사진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들은 문제가 되는 인물과 단체를 찾아가 항의와 농성을 벌이는 대신 그들의 신상을 털며 학력과 외모 등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으로 공격한다. 그들은 거리와 학교 그리고 공장에서 자신의 ‘대의’를 선전하는 대신 진보정치를 희화화하거나 비웃는 자신들의 ‘은어’와 ‘유머 코드’를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와 일상 속에서 확산시킨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더 이상 국가로부터 결정적인 변화나 개혁을 기대하지 않는다. 국가는 안보와 외교를 잘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안보에 기반을 두고 대외적인 국격을 향상시키는 것이야말로 과거 진보정권들에 의해 부정당했던 국가의 기본 목적이자 존재이유다.
 일베는 ‘인터넷 공론장 Internet as a public sphere'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담론들을 무력화시켜버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베에서 표출되는 젊은 우익들의 집단행동은 이전의 선례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론장이라는 용어는 인터넷에서의 의견 교환과 집단행동을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행해지는 의사소통 행위, 즉 공적인 숙의deliberation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에 기초해 있다. 이렇게 볼 때 인터넷이란 현실의 공론장이 지닌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제2의 시민사회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일베는 본질적으로 유머 사이트이기 때문에 공론장을 성립시키는 합리적인 논증과 토론, 시민적 윤리, 혹은 그것에 대한 규범적 요청 같은 것이 없다. 일베 유저들은 그러한 규범들을 유머감각이 결여된 씹선비질’이라며 격하하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물리친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끝없는 토론이나 논증의 과정이 아니라 상대를 단번에 희화화하고 규정짓는 유머감각이다.
 그러나 일베에서 공론장에 필요한 규범과 정당화 기제가 거부된다고 해서 그 유저들이 비이성적이거나 불합리한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그러한 것은 그들의 인터넷 문화에 어울리지 않을 뿐이다. 일베 유저들의 집단적 행동양식은 오히려 과거의 진보적인 논객들에게 시대를 앞선 것으로 칭찬받은 인터넷 환경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공론장의 합리성과 시민 의식 같은 윤리적 규범을 타인에게 굳이 강요하지 않고서도 서로 재미를 추구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베는 오늘날 인터넷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존재이며, 역설적이게도 촛불시위 때 구현되었던 네트워크 연대와 교류 방식을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터넷 환경의 변화는 비단 일베만의 특성이 아니다. 과거의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나 카페, 클럽에서 통용되었던 공론장의 규범이 오늘날에는 쇠퇴했다. 긴 글은 세 줄 요약으로 대체되고, 상황에 대한 분석보다는 상황을 한눈에 요약하는 사진이나 짤방이 각광을 받으며, 상대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바보 같고 익살스러운 모습이 더 좋은 인정 방식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인터넷 환경은 더 이상 시민적 이성을 구현할 ‘논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베에서는 이러한 인터넷 논객들의 비판이 아무런 매력도 권위도 갖지 않는다.

17

앞서 보았듯이 일베에게도 나름의 사상이 있다. 그리고 일베에게도 나름의 사상적 의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컬트문화로 그치지 않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사상적 입장이 아이러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잔혹한 유머 역시도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외면적인 진지함을 경멸함으로써 역으로 자신의 내적인 진지함과 인정욕구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일본의 극우파들도 그러한 아이러니를 통해, 단지 농담으로밖에 볼 수 없는 과격한 언행과 행동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후에 감춰진 일베의 무의식적인 사상을 재구성하고 그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또 다른 사상적인 분석틀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98

그렇다고 해서 과연 당시의 디시인사이드가 진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당시 인터넷의 정치적 분위기를 잘 표현하는 것은 진보나 좌파라기보다는 오히려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반한나라당 정서에 더 가까웠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혐오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거대 보수정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수구꼴통’, 친일독재 정당쯤으로 인식되고 비난당했다.
 그리고 오늘날 인터넷 문화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어떤 명확한 가치나 이념보다는 무언가에 대한 혐오와 안티 정서가 사람들을 결속시켰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정치적 분위기에 푹 빠졌던 사람들은 당시의 반미 감정을 기억할 것이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일방주의적인 외교,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 달을 훔쳐간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 장갑차에 여중생들이 깔려 숨진 사건에 미국이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가 반미 감정에 불을 지폈다. 오늘날 반북 정서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102~108

자유로운 욕망의 주체인 나 자신을 국가가 인정해주고 나아가 그 욕망을 몸소 실현해주길 바라는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인터넷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다만 여기서 특기 해야 할 점은 예전에 미국이라는 존재가 대한민국이 ‘정상국가’로 진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존재가 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그것이 북한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 천안함 침몰 사건을 겪으면서 오늘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민족감정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어떠한 정치세력도 이러한 감정의 상처를 우회하기는 힘들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면서까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현실을 북한 정권(과 그들을 비호하는 종북 세력) 탓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반북 정서 는 각자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했던 과거의 반공주의 이념과 다르다. 젊은이들의 반북 의식은 이미 스스로를 상호 평등한 욕망의 주체로 인식하는 문화와 정서에서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북한에 대해 당당하게 할 말을 하며 대결 구도를 불사하는 것이 곧바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묘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경제적/정치적 보복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2002년 당시 네티즌들의 ‘자신감’과 닮아 있다. 과거에 한미동맹 관계가 흔들리면 군사적/정치적 지원이 끊길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보수언론이 찌질한 존재였다면 현재는 북한과의 대결이 냉전의 고착화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겁을 먹는 진보진영이 오히려 찌질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의 정치적 풍경은 2002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감정적인 전이 대상이 옮겨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바라는 정상국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줄 국가란 (미국이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대한민국이다. 그 반대급부로 (과거에 ‘딴나라 당’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면) 지금은 ‘노완용’(노무현), ‘핵대중’(김대중), ‘촛불좀비’가 유행하고 있다. 정상국가의 실현을 방해하는 존재에 대한 안티 정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터넷을 관통하는 문화적/정치적 코드이다. 국가와 인터넷 간의 이러한 상상적인 관계(정상국가에 대한 열망)는 인터넷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오늘날에는 북한도 상상적인 인정투쟁의 상대가 되어버린다. 오늘날 네티즌들은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을 쓸 때 ‘김정은 보고 있냐’라는 투로 일관한다. 실제로는 보고 있을 리 없는데 마치 인터넷 논쟁 상대를 대하듯이 북한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며 기분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2002년 우리도 이처럼 부시 전 대통령과 안톤 오노를 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 우리는 길거리에서 “부시야, 부시야, X라이 부시야”로 시작하는 유행가를 불렀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끼친 영향

여하튼 2000년대 초반에 존재 했던 노무현에 대한 집단적인 감정 전이는 정상국가의 실현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에 대한 부정적 감정 전이(안티 정서)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노무현에 대한 추종 분위기가 거세어지면 거세어질수록 노무현에 대한 ‘안티 정서’도 자라났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노빠’라는 노무현 팬덤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이 확산되었다. 인터넷상에는 “빠(팬덤)는 까(안티)를 양성한다”라는 오랜 말이 있는데 실제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무현을 지지하는 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난 이후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노무현에 대한 광범위한 팬덤 현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대한 지지가 급속하게 사그라진 것이다.
 무엇보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추진, 야당과의 대연정 제안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노무현도 대통령이 된 이상 별수 없이 현실 정치와 국가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국가, 현실의 대통령에게 불가능한 이상을 제멋대로 한 개인에게 투사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이건 내가 아는 노무현이 아니야’라며 실망하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현실에서는 이상과 어긋나게 행동했지만 여전히 지속되었던 그의 톡톡 튀는 화법과 돌발행동은 이러한 실망감을 이내 짜증과 환멸로 뒤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욕망을 ‘무대화’할 수 있는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에 대한 안티 정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감정 전이의 대상이 시대와 정세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근래에 들어서 노무현/김대중에 대한 고인드립이 난무하게 되었다고 인터넷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만일 인터넷에 문제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애초에 인터넷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한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이 수직적인 위계 질서가 아닌 상호 평등한 네트워크 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보에 더 친화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인터넷이 수평적이고 네트워크적인 연대에 기반을 둔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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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초중반 인터넷의 분위기가 결코 ‘진보적’이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유력한 증거는 바로 인터넷이 초창기 때부터 반여성주의, 반외국인 정서를 담아냈다는 데 있다. 가령 디시인사이드, 다음 아고라, 웃긴대학과 같은 주요 커뮤니티들에서도 군가산점제 폐지(2000)와 성매매특별법(2004) 그리고 호주제 폐지(2005) 같은 의제들은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여성주의적 의제가 전혀 인터넷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인터넷이 남성중심적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기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군필자 남성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안티 정서가 인터넷상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는 이른바 ‘노빠’라고 불리는 집단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표출되었다. 한나라당을 전통적으로 지지했던 지역에 대한 지역 비하 발언 역시 과거에 존재했다. 가령 대구는 배트맨에 등장하는 고담시티에 비유되어 ‘고담대구’로 표현되었고 범죄로 가득 찬 낙후된 도시로 묘사되곤 했다. 2004년 지율스님이 단식투쟁을 벌인 바 있는 천성산 터널 반대운동과 같은 지역적/생태적 이슈들도 인터넷 커뮤니티상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반대로 노무현 집권기의 이라크 파병 문제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대외적 지위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한때 진보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로 표출된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은 한국 사회의 지역적, 생태적, 여성주의적, 다문화적 가치들을 담아낼 만큼 ‘진보적’이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런 가치들은 현실의 국가도 이상 속의 국가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런 진보적 가치들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속에서, 이를테면 지역사회, 성소수자 커뮤니티, 협동 조합, 노조, 진보적 학생서클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받아야 한다. 정치인이 정책을 대신 실현해줄 수 있어도 그/녀가 그 ‘이상’을 대리해줄 수 없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도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강행하고, 노동법을 개악하고, 한미 FTA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등 폭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실망한 사람들은 그보다 한 술 더 떠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비극을 낳은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켰다. 급속한 심리적 환멸과 실망이 사람들을 차악이 아닌 최악으로 치닫게 한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에서 얼마나 실망하든, 옳은 것을 옳다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꾸준히 외쳐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환경단체에 가입해서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꾸준히 문제의식을 느껴온 사람들은 현실의 정치인에 대해 아무리 실망을 해도 초심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주변에는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를 공유하고 함께 작게라도 행동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무언가 막연한 정의감에 북받쳐 인터넷에 시시비비를 논해온 쪽이 오히려 쉽게 절망하고 전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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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도 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없이는 현실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실현할 수 없다. 오히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치적 이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상상적인 국가를 향한 강박으로 나타나기 일쑤였다. 그것은 진보는 보수든 마찬가 지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에서 유저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 어떤 것이든 간에 국가는 그러한 네티즌들의 이상을 자신의 편의대로 이용해왔다는 사실이다. 진보적 네티즌들이 추종했던 노무현 정권도 그랬고, 최근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에서 드러났듯이 보수적 네티즌들이 추종하는 국정원도 마찬가지였다.

110~115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

일베의 은어와 혐오 문화
일베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그 안에서 유행하는 독특한 은어와 말투다. 그리고 이러한 인터넷의 유행어들은 상당수가 비꼬거나 조롱하는 대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상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베의 유행어들을 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지역에 대한 비하, 여성에 대한 비하, 진보적 시민에 대한 비하, 정치인에 대한 비하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일베에서는 전통적으로 야당을 지지해왔던 호남지역에 대한 반감이 두드러진다. 전라도는 라도, 전라디언, 홍어, 심지어 ‘7시 방향’으로 불리고 있다. ‘7시 방향’이란 스타크래프트라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 빗댄 표현인데, 게임맵상에서 보면 전라도가 7시 방향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까보칠과, 알보전과 같은 모욕적인 표현이 있다. 알보전은 ‘알고 보니 전라도’, 까보칠은 ‘까보니까 일곱시 방향’이라는 뜻인데, 과격한 진보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하나같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몇 시 방향’이라는 표현 자체가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상대편 기지로 러시(공격)를 가야 할 때 주로 사용된다. 여기서 전라도는 말하자면 정복 혹은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라도가 전통적으로 야당 성향이 된 이유, 그리고 호남과 영남이 지역 갈등을 빚게 된 역사적 배경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또한 전라도 사람들을 수식하는 말로서 ‘통수’(전라도인들은 뒤통수를 잘 친다는 속설을 반영한 말), ‘오오미’(‘오메~’라는 전라도식 감탄사를 뒤튼 말), ‘~랑께’등이 있다. 가령 “오오미~ 라도는 역시 통수가 갑이랑께”. 또한 상대편에 대한 동의를 가장하면서 상대의 이중 잣대와 위선을 비꼴 때 ‘암 그라제잉’과 같은 전라도 방언을 흉내 내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암 그라제잉, MB정부가 하면 민간인 사찰이고, 민주당이 국정원 여직원 감금하는 건 정의랑께”등이다.
 진보적 시민들은 일베에서 대개 ‘촛불좀비’, ‘좌빨’, ‘좌좀’등의 이미지로 희화화된다. 이들은 짤방이나 정치적인 비하 발언 속에서 의식 있는 척하지만 실은 머리가 비어 있거나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아무 생각 없이 휘둘리는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표상되곤 한다. ‘알보칠’이나 ‘까보전’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지역 출신이 때로는 ‘신상털이’의 대상이 되기 한다.
 무엇보다 일베에서는 진보적 시민들이 지지하는 정치인들을 관용적으로 비꼬아 표현하는 말들이 유행한다. 가령 노무현은 ‘놈현’, ‘운지’, ‘노완용’, ‘노알라’ 등으로 표현되고 김대중은 ‘슨상님’, ‘핵펭귄’(다리가 불편했던 그의 장애를 조롱하는 표현), ‘다이쥬’(김대중이 창씨 개명한 이름) 등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정치 풍자 짤방에서 예외 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다. 그들은 북한에 대해 비굴한 행동을 하거나 은연중에 북한의 김부자 정권에게 동조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특히 노무현과 김대중을 조롱하는 일상적인 유행어 중에 ‘앙망하옵니다'와 ‘~하盧’ 등이 있다. ‘앙망하다’는 지금은 거의 사어가 되다시피 한 의고적 표현인데, 과거 김대중이 군사정권하에서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사면을 부탁하는 편지에서 사용한 단어다. 일베 이용자들은 이것을 빗대어 다른 유저들이나 관리자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앙망한다”는 표현을 쓴다. 예를 들어 누군가 희귀한 연예인들의 노출 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거기에 대고 댓글로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적고 “앙망합니다”를 다는 식이다. 정치적 탄압 앞에 목숨을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드러난 서글픈 인간적 단면이 웃음거리의 소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은연중에 조롱하기 위한 의도로 ‘~하盧’의 노를 구태여 노무현의 성으로 표현하거나 ‘전 노무현 고 대통령’이라는 식으로 단어를 뒤바꿔서 희화화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베 게시물의 유행어들을 살펴보면 젊은 한국 여성에 대한 비하가 유독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베인들은 한국 여성들을 싸잡아 ‘김치녀’, ‘김치년’이라고 부른다. 물론 한국인을 통틀어 김치녀, 김치맨 등과 같은 단어로 비하하는 것은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일상적이다. 하지만 일베에서 김치녀는 한층 더 부정적인 용례로 사용된다. 그녀들은 대개 허영심이 많고 물질적으로 남성을 이용하려 하면서도 매사에 피해 의식을 갖는 위선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소위 ‘김치년’은 독립심 강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외국 여성들과 종종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부 일베인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꽃뱀질은 김치년 종특(종족 특성)”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은어들을 조합해서 표현한다. 이러한 반여성주의적 감수성은 여성을 비하하는 수많은 하위주체 개념들을 파생시켰는데, 가령 남성을 물질적으로 이용하는 여성은 ‘보슬아치’(벼슬아치라는 단어에 여성의 성기를 빗댄 것)라고 불린다. 물론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표현은 현실 어디에나 있다. 필자가 즐겨 다니는 (오타쿠 성향의) 루리웹 유머 게시판에도 한국 여성들을 싸잡아서 김치녀라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루리웹을 포함해서 다수 커뮤니티에서 김치녀 운운하는 것이 농담 수준을 넘어서면 “그러는 너의 자매나 어머니 그리고 미래의 배우자도 김치녀 아니냐”는 반격(?)이 들어온다. 반면 일베에서 이러한 반여성적 경향에 대한 자정 작용 같은 것은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베 게시판에서는 일반적으로 유저가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인증하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게시물에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밝힐 때 일베 유저들이 “김치녀 벤(접속차단)” 혹은 “김치녀 OUT”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1] 애초에 여성이라는 것을 밝혀봤자 아무런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여성 혐오가 극에 달한 일부 유저들은 여성을 ‘삼일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다소 충격적이지만,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의 준말이다. 이밖에도 일베에서는 여성의 성기를 빗댄 ‘봇물 터진다’, ‘부왘’ 등의 여성 혐오 표현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베 유저들이 현실에서도 노골적인 여성 혐오자이거나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베의 ‘고민 게시판’을 들어가보면 여느 남초 사이트와 마찬가지로 이성교제에 대한 고민상담이 올라오기도 한다. 일베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이를테면 ‘주먹’ 같은 유행어에 극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활자상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아무리 소위 김치녀라 해도 ‘주면 먹는다’는 식이다. 일베의 이러한 경향은 다른 남초 사이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혐오 성향 내지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이가 있다. 일베의 경우 “우리는 여성들의 위선과 가식에 관해서 완전히 계몽되어 있다”는 태도를 더욱 공공연하게 과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시적인 태도가 여성을 공공연히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발언을 부추기는 것이다.

132

⋯이러한 혐오 문화가 일베에서 시작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의 혐오 문화, 타인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능력의 과시 등은 오히려 진보적인 인터넷 논객 쪽에서 시작되었다. 일베의 새로움은 그러한 혐오 문화를 집단적인 문화, 집단적인 권리로 공유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일베는 일종의 인터넷의 민주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36~140

팩트 위주의 사회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일베 유저들이 일베 바깥의 사회와 소통하는 데서 사용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 그들은 우선 재미를 내세우며 그들의 은어와 특유의 화법을 현실과 가상세계의 커뮤니티에 확산시킨다. 가령 ‘오오미’라는 감탄사라든가, 자살을 포함해서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하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운지’와 같은 용어들은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별 생각 없이 일상 속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 일베가 내세우는 것은 ‘재미’라는 코드다. ‘좌좀’, ‘운지’, ‘노알라’ 라는 용어를 퍼뜨리면서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너희도 ‘쥐박이’, ‘닭그네’, ‘수꼴’과 같은 용어를 쓰며 상대를 풍자하지 않느냐? 우리의 행위를 어디까지나 재미로 받아들여라.” 이러한 일베의 메시지는 정치를 ‘재미’와 ‘즉흥성’ 이라는 코드로 사고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현실의 공론장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이나 혐오 문화를 단도직입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 주장이 지닌 논리적인 허점이나 공백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여기서 일베 유저들이 일베 바깥에서 행동하는 방식은 일베 안에서 하는 행동과 전혀 다르다. 일베 유저들이 다른 이들과의 정치적 논쟁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이른바 ‘팩트’다. 상대방의 주장이 근거를 두고 있는 팩트 중 무언가 하나라도 틀렸다면, “거봐, 너희들은 항상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나 일면적인 진실만을 가지고 감성팔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해온 것이 아니냐?”며 몰아붙이는 식이다. (다소 맥락은 다르지만) 노정태라는 한 진보 논객은 어떤 주장이 담고 있는 이념이 나 가치관보다는 그것이 기반을 두고 있는 팩트를 중요시하는 해태를 일컬어 ‘팩트 골룸’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파편적인 정보를 종합해서, 통일적인 인식을 구성하거든요. 하지만 팩트 골룸 여러분께는 바로 그 종합적 기능이 대단히 부족해요.”[2] 이러한 발언은 인터넷 블로그상에서 이른바 팩트 골룸 논란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지금의 인터넷 문화에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팩트 골룸이 될 수밖에 없다. 일베가 인터넷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 부분은 바로 그러한 팩트 중시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터넷 문화는 언어의 수사적이고 상징적인 측면, 내면적인 진실성보다는 언어의 논리적인 정합성과 외면적인 사실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논객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경향과도 잇닿아 있다. 논객이 공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수행성(이념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호소력) 에 있는데 그것이 인터넷에서 점점 발붙일 곳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노정태의 반응은 저 인터넷의 경향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확실히 오늘날 네티즌들은 모두가 마치 아마추어 ‘논리실증주의자’[3]처럼 행동하곤 하는데 이는 일베의 등장 이후 더 두드러지게 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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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아가 팩트에 어긋나거나, 검증 불가능한 선전/선동들은 일베 유저들에게 이른바 ‘감성팔이’로 공격당한다. 가령 2013년 상반기에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적자’와 ‘방만한 경영’ 을 이유로 진주의료원을 폐쇄할 때 여야를 막론하고 비난이 쏟아졌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환자들을 배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팩트들이 있을 것이다. 진주의료원 사태에도 이른바 노조의 직장 세습 의혹이나 재정적자 문제도 불거졌지만, 한편으로는 지역의료체계가 재정적으로 자립하기 힘든 ‘사회적 구조’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일베 유저들의 관점에서 후자와 같이 ‘구조’에 입각하여 사회를 통합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일베 유저들의 눈에 비치는 팩트란 이른바 진주의료원 노조가 자신의 부당한 ‘특권’을 지키기 위해 감성팔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유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주 시민들은 진주의료원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가 갑자기 이슈로 터지니까 군중심리와 같잖은 정의감으로 발광하는 것이다.”[4] 바로 이 같잖은(?) 정의감을 일베 유저들은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들은 진보주의자들이나 좌파의 주장들 중 상당수가 사실관계와 어긋나거나 검증될 수 없는 감성팔이라고 의심한다. 이러한 의심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주장이 지나치게 당위적이고 가치 지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주장이든 가치판단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현실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보자. 진주의료원이 재정적자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이른바 ‘착한 적자’라는 사업비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의 전환도 가능하다. 국가가 행하는 정당한 복지 지출을 ‘적자’라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발상 자체도 박근혜에게서 나왔다. 그렇다면 박근혜는 감성팔이를 일삼는 좌빨이란 말인가? 결국 진주의료원 문제도 가치관의 문제이다. 일베 유저들이 비난하듯 ‘원래는 존재감이 없던’ 진주의료원이 노조와 좌익의 선동 때문에 ‘논란’ 이 된 것이라면 진주의료원과 같은 공공의료기관을 제도적으로 더욱 ‘확산’ 시켜서 굳이 ‘논란’을 만들지 않고도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일베 유저들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일베 유저들은 커뮤니티 ‘바깥’에서 논쟁할 때 흔히 회의론적인 상대주의자의 입장을 취한다. 물론 이러한 회의주의적인 태도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만 —가령 자신이 해야 할 사실 검증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든지, 자신은 신념을 말하면서 타인이 신념을 밝히는 걸 가로막는다든지 — 한편 그것은 일베 ‘안’에서처럼 자신의 혐오감과 타인에 대한 편견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이긴 한다. 예를 들어서 일베 유저가 사뭇 중립적이고 무사 공평한 태도로 “5·18이 폭동이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며 “이미 의문이 제기된 이상 폭동 여부에 대한 의혹을 역사적으로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커뮤니티로 돌아가 ‘홍어’니 ‘전라디언’이니 하며 5·18을 폭동으로 단정을 지은 채 본인 스스로가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하는 이중성을 자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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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일베가 바깥에 자신의 ‘사상’을 퍼뜨리는 방식은 무엇보다 ‘팩트 위주’의 사고방식을 설파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의 진정한 요점은 단순한 상대주의적 회의론을 넘어선다. 일베의 사상은 팩트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 팩트를 초월한 이념과 이상이 사람들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겠다는 결의에 더 가깝다. 일베 유저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대중들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어떤 명확한 이상과 이념을 내세우며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베 유저들은 ‘몰이상’을 철저하게 고수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몰이상성 역시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이념적이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야말로 어떤 이상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의 심리적인 경향마저 부정하고 조소하는 것이야말로 ‘이념적’이다. 여기서 일베 유저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놓치고 있다. 현재의 불확실한 상황을 명확한 것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람들의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을 모아야 할 때가 있다. 비록 그 안에서 ‘닭그네 탄핵!’과 같은 과격한 구호가 나오더라도 어쨌든 광장에서 분노한 사람들이 나와 촛불을 들지 않는다면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작업은 금방 흐지부지될 것이다. 팩트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때로는 행동에 나서서 정치인과 국가기관에 압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이야기는 일베 유저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어차피 ‘선동’이나 ‘감성팔이’로 들릴 것이다. 앞으로도 일베 유저들은 감성팔이와 팩트 사이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명한 구분에 집착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천안함 장병들을 애도하는 것은 ‘감성팔이’와는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러한 고집스러운 자신들만의 구분에서 ‘일베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일베의 사상이란 한마디로 몰이상의 이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일베 유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의지와도 같은 것이다. 한 트위터 유저는 팩트를 중시하는 일베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이상향’을 발견한다. “제가 보는 일베저장소는 이상향입니다. 좋든 싫든 일베저장소의 모습이 우리가 민주주의의 검은 면을 피하려는, ‘더는 속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도달해야 할 토론장의 모습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5] 그들에게 광우병 촛불시위는 물론이고, 효순이 미선이 촛불시위, 노무현 후보의 당선 모두 진보와 좌파의 감성팔이에 의해 속아 넘어간 정치적 결과이다. 물론 실제로 노무현 정권이 이해할 수 없는 실정을 저지른 경우도 있었고, 촛불시위 때 나왔던 주장 중에서 사실관계에 어긋난 괴담들이 상당수 있었다. 무엇보다 거기서 생겨난 혼란들이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과정들을 거치면서 교훈을 얻을 것인지, 그렇게 교훈을 얻고 발전할 가능성을 철저하게 불신할 것이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전자가 부정→부정의 부정→긍정으로 나아가는 헤겔 변증법에 가깝다면, 후자는 부정 → 부정의 부정→더 철저한 부정으로 나아가는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일베 유저들은 명확히 부정변증법의 편에 서 있다. 애초에 변증법적인 여론의 형성과 자기자정 기능을 불신하는 측에서 ‘민주적 토론장’ 이라는 이상향을 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일베 유저 자신들이 토론장을 신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베의 그러한 몰이상주의가 정치적 이상에 의해서 스스로 좌절하거나 상처받아본 인간들에게 공명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일베 유저들 중에서는 자신이 과거 노무현의 지지자였거나 촛불시위에 나가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일베의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경험이 일베의 집단 무의식의 중핵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다시 속아서는 안 된다’, ‘감성적인 이상주의에 또 한 번 휘둘리느니 철저하게 몰이상성을 유지하겠다’라는 것이 일베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위악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는 그들의 몰이상, 아니 몰이상의 이상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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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베의 담론은 이렇듯 사실을 감성과 이상에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베 유저들이 중요시하는 팩트란 실상은 지극히 감성적인 인간관,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가령 ‘팩트 대 감성팔이’라는 저 구분 자체가 감성적이고 이념적이다. 예를 들어 일베 유저들 자신이 항상 논쟁 과정에서 팩트에 강하냐 하면(나중에 보겠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5·18이 폭동이라는 의혹을 제기할 때 단번에 논박될 수 있는 사실관계에서 어긋난 주장들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팩트의 중요성은 오히려 이념적인 것이다. 팩트를 운운하며 그들이 실제로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나도 병신이지만 너도 그 못지않은 병신이다”라는 사상이다. 그것만이 그들에게 유일무이한 팩트이다. 일베의 팩트 중시는 따라서 팩트 이외의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무미건조한 팩트와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은 타인과 혐오감, 경멸감을 주고받는 것 외에는 없다는 태도에 더 가깝다. 예를 들어 5·18민주화운동에서 희생당한 시민을 ‘홍어’라고 조롱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이 팩트냐?’라는 것은 사실 전혀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조롱은 오히려 상대에 관한 이런저런 팩트를 넘어 그 인격의 전체 본질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조롱을 통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팩트에서 해방(?)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해서 표출된 욕설과 조롱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일베의 특이함은 그러한 사실을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네가 병신인 만큼 나도 병신이라는 것을 쿨하고 재미있게 인정하는 것에서 일베의 유대관계와 상호인정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일베 유저들은 그러한 부정적인 호수성만이 현실의 국가와 사회 속에서 구현된 인간관계와 질서를 넘어선 집단적이고 평등한 ‘유대’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진보/좌파들이 ‘너도 나도 같은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상호적이고 평등한 인정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려 한다면, 일베는 정반대로 ‘너도 나도 병신이다’라는 상호인정에서 출발한다. 이것 역시도 일베 나름의 ‘이상’ 이다. 한편으로는 일베의 ‘이상’ 과 전혀 다른 ‘이상주의’에 기초해서 현실의 국가와 사회를 넘어서겠다는 의지야말로 일베 유저들이 궁극적으로 경멸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일베가 인터넷에서 전개하는 담론 투쟁은 단순히 진보와 좌파 사이의 정치 대립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의 국가와 사회를 넘어선 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상상의 차이로 요약할 수 있다. 일베와 인터넷 진보/좌파들의 차이는 그들 간의 공동체관의 차이로 수렴된다. 우리는 일베가 단순한 냉소주의나 몰이상에만 근거한다고 봐서는 안 된다. 일베 자체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두가 동등하게 혐오할 권리를 나눠 갖는 평등한 형제애의 공간에 관한 유토피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보좌파 세력에 대해 갖는 반감은 바로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지지하고 신봉하는 유토피아적 사상에서 유래한다.

  1. 게시판에서 자신의 얼굴이나 몸을 인증한 여성 유저를 중심으로 게시판 내 친목 카르텔이 형성되었던 과거 디시인사이드의 경향에 대한 반발감으로 이를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2. 노정태, 〈팩트 골룸 여러분들에게〉 (http://basil83.egloos.com/4905765)
  3. 1924년경 M. 슐리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오스트리아 빈(Wien) 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지칭한다. 명제의 분석적이고 검증 가능한 의미들만을 수용하거나 중시하는 철학적 입장.
  4. 〈진주의료원 폐원〉(http://www.ilbe.com/1327363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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