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머리말이 가장 중요한 논지를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하므로[1], 머리말을 모두 옮겨두기로 했다. 중간중간 옮기고 싶은 부분들도 물론.
머리말(pp.11~20)
34~35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가 지적하듯, 미국 에서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소득 사이의 상관관계는 0.5나 된다.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부모의 키와 자식의 키 사이에서 나타나는 연관성의 크기와 거의 같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명석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각자가 취해야 마땅한 첫 번째 조치는 바로 그런 부모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태어날 때부터 명석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어떤 이론을 갖다 붙여야 그런 자질을 자기 스스로 획득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부모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자라온 환경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일 뿐이다.
39~41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 탓에 계속 노력한다는 두 번째 측면은 인간의 흥미롭고도 별난 특성을 암시한다. 여러 학자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 중 절반이 훨씬 넘는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도 자신의 재능이 상위 50퍼센트 안에 든다고 믿는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경쟁에서 승자가 될 가능성에 대해 현실과 달리 낙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면, 실제로 성공할 가능성이 생각했던 것보다 낮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면 노력 자체를 단념하거나 적어도 힘이 빠지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
(중략) 언젠가 워런 버핏이 (중략)
이 나라에서 혼자 힘으로 부를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 밖에 공장 하나를 지었다고 칩시다. (⋯) 그러면 여기 우리가 낸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를 통해 시장으로 상품을 운반할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가르친 직원들을 고용하겠죠. 여러분의 공장은 안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금으로 유지하는 경찰과 소방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이 공장을 지었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면, 정말 축하할 일이지요. 공장을 키워서 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회적 계약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 여러분도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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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름의 첫 글자가 성취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한 예로, 상위 10위 안에 드는 각 대학 경제학부 조교수들을 조사한 결과, 성의 첫 알파벳이 빠를수록 종신재직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연구를 기획한 사람은 공동으로 쓴 논문일 경우 저자의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 기재하는 경제학계의 관례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설명한다. 저자의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적지 않는 심리학계에서는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131~137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행동 연구를 통해 잘못된 믿음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경향성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한 예로, 왜 우리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어떤 재능이든 간에 자신이 상위 50퍼센트 안에 들리라고 믿는 것일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아주 명백한 근거 앞에서도 행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일까? 내가 제시하고 싶은 한 가지 그럴듯한 설명은, 자신의 재능과 행운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 현실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성공으로 가는 길 위에 산재해 있는 온갖 난관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며 전진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돋보이게 만드는 무언가를 기꺼이 믿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이 습성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새뮤얼슨은 비록 행동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검증된 수준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대체로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실제로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운전 실력을 평균보다 높게 평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자기 과실이 큰 교통사고로 입원한 운전자들조차 그렇게 평가한 비율이 80퍼센트 이상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인구 집단의 평균치보다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습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다리를 하나 이상 잃은 소수의 사람이 존재하는 반면, 다리가 셋 이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떤 인구 집단의 평균적인 다리 개수는 2에 살짝 못 미치기 마련이다. 바꿔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평균보다 많은 다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평균적인 운전 실력을 수치로 나타내는 척도는 무슨 수로 정의할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조사 대상자들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평균 이상의 운전자’라고 말한다면, 이는 ‘평균적인 운전자보다 더 능숙하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전체적으로도 불가능한 그림이다. 전체 분포에서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들 상위 50퍼센트 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 문이다.[2]
우리는 스스로 꽤 잘하고 있다는 부정확한 믿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덕분에 관련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 대학에 재직하는 교수들 가운데 70퍼센트가 교수로서 자신의 능력이 상위 25퍼센트 안에 든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어느 경영대학원에 재학 중인 우수생들 가운데 87퍼센트가 자신의 학업 성적이 상위 50퍼센트 안에 든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왔다.
이러 경향을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라 부른다. 워비곤 호수는 미국의 풍자작가 개리슨 케일러의 라디오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아이가 평균 이상’인 가상의 마을이다. 이 효과는 운전 실력처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특성이나 자질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한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 가운데 오직 2퍼센트만이 자신의 리더십 능력이 평균 이하라고 응답했으며, 사실상 모든 학생이 친구들과 잘 지내는 능력에서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행운에 대한 잘못된 믿음 역시 흔하다. 이를테면 복권 당첨자들이 당첨 번호를 콕 집어서 찾아낸 기법이나 통찰력에 대해 이따금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식이다. 찰스 클롯펠터와 필립 쿡은 1991년 논문에서, 꿈에 나타난 이미지를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당첨 번호를 알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인기 있는 책들을 검토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책들 가운데 저자들이 하버드 야드의 노점에서 구입한 『알리 왕자의 행운별 다섯 개』를 보면 사과가 나 오는 꿈은 416번, 벌레가 나오는 꿈은 305번, 무덤이 나오는 꿈은 999번, 목사가 나오는 꿈은 001번을 선택하라는 지침이 나온다.
하지만 무작위로 당첨 번호를 뱉어내는 난수 발생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당첨 번호를 예측하려고 애쓰 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잘 안다. 모든 가능한 번호가 균일한 확률로 선택되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첨 번호를 알아내는 기법이나 능력을 어떻게든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실패를 설명할 때는 운이 나빴다는 사실을 기꺼이 그리고 재빨리 받아들이지만, 성공을 설명할 때는 행운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근거와 믿음 사이에 또 다른 단절이 발생한다. 통계학자 나심 탈레브는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경향이 흔히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동기가 부여된 인식motivated cognition의 결과로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좋게 느끼기를 원하고, 그래서 자신이 매우 유능하다고 여기는 동시에 실패를 자신의 통제 밖에 있다고 생각하면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가 더욱 빛날 것으로 본다는 주장이다.
심리학자 로런 앨로이와 린 이본 에이브럼슨은 1979년 ‘더 슬프게, 그러나 더 현명하게’라는 부제가 달린 논문에서 이 이론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 앨로이와 에이브럼슨은 우울한 사람이 세상과 자신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부정적인 믿음을 품게 하는 인지적 편향으로 인해 고통받는다고 하는 기존 학설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제시한 대안적 가설은 ‘우울증적 현실주의’였다. 이 가설에 따르면, 겉으로 정상인 사람보다 우울한 사람의 자기평가가 실제로 더 정확하다.
이 가설은 임상적으로 우울증이 있는 학생 집단과 우울증이 없는 통제집단을 비교하는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두 집단의 실험 참가자들은 다양한 과제를 수행하고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지 스스로 평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우울증이 있는 학생들의 자기평가는 외부 관찰자의 평가와 유사했다. 하지만 통제집단의 학생들은 달랐다. 성공한 과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기여도를 시종일관 과대평가했고, 실패한 과제에서는 자신의 기여도를 과소평가했다.
이 논문은 상당한 논쟁을 불러왔고, 아직도 연구 결과에 대해서 확고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식으로 연구 결과를 해석하는 이들도 이런 믿음이 장기적으로는 상당한 손실을 초래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기적 손실의 가능성은 우리가 행복감을 선사하는 신경체계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한 행동에 박차를 가하는 신경체계를 적자생존 과정에서 형성했다는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이 어떤 경쟁에서도 승리할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승산이 없는 여러 경쟁에 발을 들임으로써 불필요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의 실패를 운이 나쁜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한 사람들은 다양한 피드백을 받아들여 성과를 개선해나갈 수 없을 것이다. 두 경향 모두 번식 성공률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잘못된 믿음이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복한 사람들이 현실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물질적인 측면에서 좀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다음 장에서 검토할 한 가지 가능성은, 능력과 행운에 대한 더 정확한 믿음이 장기적으로 모든 사람의 물질적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공공 정책에 대한 지원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견지하는 자세가 필요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경제학자 마이클 마노브는 그럴듯한 예를 든다. 그는 경제학부 부학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경제학자로서 주특기를 발휘했다. (중략) 그는 부학장이라는 직책 탓에 동료들보다 덜 행복해졌지만 더 부유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다윈주의적 투쟁에서는 얼마나 행복한가보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마노브 자신이 생각하는 그 경험의 교훈은, 순진한 낙관주의가 필요한 때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 직면하게 되는 엄청난 어려움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내렸다면, 계속해서 전진하겠다는 용기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에 뛰어든 사람들은 성공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쏟아붓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을 해내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순진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