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6 부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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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 - 새로운 몰락의 시작, 금융위기와 부채의 복수
마이클 루이스 (지은이),김정수 (옮긴이)비즈니스북스2012-02-10원제 : Boomerang (2011년)

p. 23

당시 미국 정부는 베어 스턴스를 비롯해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이 저질러놓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2조 달러에 이르는 부실 증권 관련 위험을 다양한 형식으로 흡수하기로 했다. 이 조치는 다른 부유한 선진국 정부들이 취하는 것과 동일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민간 금융기관의 고액 봉급자들이 저지른 부실 대출을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떠안았던 것이다.
카일 배스의 견해에 따르면 금융위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부유한 선진국들의 전적인 신뢰와 신용으로 억제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배스와 그의 동료들이 이 사태가 어 떻게 귀결될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 토론에 집 중하다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들은 일부 채권의 부도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부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번뜩이는 투자이론은 새로운 것이었는데 그 내용을 간략히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2002년부터 부유한 여러 선진국들에 거품 경기가 있었다. 외형상 경제가 성장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들이 갚을 능력이 없는 돈을 빌려 이룬 것이었다. 2002년 이후 전 세계의 부채는 공채와 사채를 합해 대략 84조 달러에서 195조 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배스는 “세계 역사상 이토록 엄청난 부채가 쌓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p. 63

현재 세계 금융위기의 감춰진 원인 중 하나는 위기가 올 것을 예상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널리 알리려 하기보다 매도포지션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이슬란드를(혹은 리먼 브러더스를) 금융 범죄로 확실하게 고발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 분 자기 이익만 돌보는 어리석은 모리배 취급을 받았다.

p. 69

사실 아이슬란드에서는 누구나 총리를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대여섯 명 정도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이슬란드인은 모두가 스스로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세계적인 금융인으로 대접받는 겁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총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총리가 아이 슬란드인에게 국가 붕괴에 관해 무슨 말을 할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아이슬란드 금융정책 수립자들은 금융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상무장관은 철학자, 재무장관은 수의사, 중앙은행 총재는 시인이었다. 호르데 총리는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지만 그리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아이슬란드 대학 경제학과는 그를 B- 학생으로 평가했다.
독립당의 지도자들은 금융에 무지하면서도 유능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금융 공황을 전공한 런던 대학 경제학부의 아이슬란드인 교수 욘 다니엘슨(Jon Danielsson)이 도 움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가 퇴짜를 맞았고, 이는 아이슬란드 대학의 다른 저명한 금융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똑똑한 중앙은행장들의 충고도 무시했다.
독립당과 그 총리가 아이슬란드 여성들의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가족을 차에 태우고 가다가 유명한 건물을 찾지 못해 헤맬 때, 아내가 불평을 해도 차를 세우고 방향을 물어보지 않는 부류다.

pp. 75~76 새로운 부를 통해 아이슬란드는 변모했다. 1,100년 동안 외딴 벽지이던 그곳은 비외르크를 낳은 곳으로 바뀌었다. 아이슬란드 태생의 유명한 음악인이 나온 이유는 그들에게 음악 연주를 비롯해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가령 아이슬란드 젊은이들은 유학을 가는 것은 물론 온갖 흥미로운 방 식으로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 있었다. 어업 정책으로 변화가 일어 난 아이슬란드에서 '대구'는 박사학위를 위한 도구로 탈바꿈했다. 물론 그런 변화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들은 생계를 위해 고기를 잡으려 하지 않았고 무언가 다른 일을 찾았다. 그 일이 아이슬란드의 다른 천연자원, 즉 에너지를 이용 하는 산업에 취직하는 것은 아니었다. 폭포와 펄펄 끓는 용암은 어마어마한 동력을 생산했지만 석유와 달리 이 에너지는 수출이 불가능해 수익성이 없었다. 아이슬란드의 동력은 아이슬란드 안 에 갇혀 있었다. 아이슬란드인들은 그 문제 앞에서 이렇게 자문했 다. 막대한 양의 동력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는 일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찾아낸 해답 은 알루미늄 제련이었다. 우리는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75 제1장 | 드라의 원스트리트 Scanned with CamScanner page: 6 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슬란드인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아이슬란드인은 어 떤 일에 적합할까?" 자신이 알루미늄 제련에 타고난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아이슬 란드인은 한 명도 없었다. 사실은 그 정반대였다. 2004년 거대한 제련공장 건설에 착수한 아이슬란드 최대의 알루미늄 회사 알코 아(Alcoa)는 아이슬란드에만 존재하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민속 문화에 깊이 젖은 아이슬란드인 중에 엘프(elf) 요정 의 존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다. 알코아는 제련 소를 세우기에 앞서 울타리로 둘러싼 공장 부지를 샅샅이 조사해 땅 위나 밑에 엘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알코아 대변 인이 내게 말한 대로 그것은 정말로 난감한 일이었다. 공장 부지 에 엘프가 없다고 선언하려면 전문가를 고용해 작업을 하느라 돈 과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변인은 “회사로서는 엘프의 존 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